마태복음 24:36~39 그 날과 그 때 2017. 7. 9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차멀미를 많이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은 직접 운전을 하면 전혀 멀미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운전을 하면 앞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좌회전이 될지 우회전이 될지를 알기에 뇌가 미리 몸의 균형을 잡도록 지시를 한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지 않고 있으면 예측하지 못하였는데 몸이 쏠리게 되니 몸의 균형감각을 제대로 잡지 못하여 멀미를 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무인자동차 시대가 열리면 멀미 문제가 가장 클 것이라고 뇌 과학자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멀미하는 사람은 운전석 옆에 앉아서 앞길을 보면 덜 합니다.

 

왜 갑자기 멀미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우리의 인생도 예측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5분후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확실하게 안다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염려가 가득하여 온갖 미신과 종교가 성행을 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만이 아니라 사후의 문제도 두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추구하거나, 점집을 찾거나, 흔히 말하는 고등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내일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전도서 7:13~14절입니다.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굽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일취월장(日就月將), 승승장구(乘勝長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굽게도 하시고 형통함과 곤고함을 병행하여 두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래 일을 헤아려 알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래를 대비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면 개인이나 국가의 장래 일을 알게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미래를 알게 된다고 하는 자들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아모스 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지자를 핍박하면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은 북 이스라엘은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문맥과 상관없이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날도 기도를 많이 하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알린다고 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날짜나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날짜 예언은 교회 역사 속에서 많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고 천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말했습니다. 그런 자료들만 모아서 이야기하여도 몇 시간이 부족합니다. 수많은 이단에서도 재림의 날짜를 말했고 정통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날짜를 계산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1988년에 휴거된다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말들은 열 번도 넘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명백한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대하여서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다시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을 무화과나무 잎이 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자의 임함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임을 지난주에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인자의 임한 곧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 성령이 임함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니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제자들이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1:6~8절입니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1~5절을 보면 먼저 쓴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까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였을 때에 제자들은 이 때에도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인지를 묻습니다. 제자들이 물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그 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으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되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그 날과 그 때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니 그 날과 그 때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날과 그 때가 십자가로 완성된 것임을 알고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전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유대인들이기에 이 벽을 넘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선민의식이 깨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성령이 임하여도 그들의 율법적인 전통들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여 예루살렘에 복음이 증거 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이 120명이었습니다. 이들이 권능을 받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전했을 때에 하루에 삼천 명과 오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복음을 들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지만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 믿음과 성령 임함이 다르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개같이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이 임함을 목격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려고 가지 않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벽이 이렇게 높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환상이 보인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과 곤충들이 가득한 그릇이 내려옵니다. 음성이 들리기를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이런 것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환상이 세 번 있은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때에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옵니다. 성령께서 따라가라고 하여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물론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만 그들이 거절하면 이방인에게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증거 되자 전통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을 믿은 자들과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전통 유대인들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이 안 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래서 사도들의 회의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보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7~11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유대인입니다. 그들의 전통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며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였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율법적인 전통을 벗어내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사마리아에 간일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간일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를 직접 목격하고서 이제 사도들의 회의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율법의 멍에를 메지 못한 것을 왜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하느냐면서 우리나 그들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무너지는 말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12절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가 이 말을 하니 온 무리가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바나바와 바울이 말합니다. 여기서 바나바가 먼저 나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때에 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울을 소개한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그 일들을 말하니 그 모인 무리들이 다 듣습니다.

 

13~18절입니다.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증언들을 마치자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야고보가 인정하면서 확실한 근거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인용 구절이 아모스 9:11~12절입니다. “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킨다는 것을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만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킨다는 내용에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전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있는 것입니다. 그런 수건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바울에게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자 하루 벗겨지게 되었습니다만 하루아침이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이들을 이끌어서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하심을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날과 그 때가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린 그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과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 날과 그 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셨으며 그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린 사도들의 결론입니다.

 

사도행전 15:18절입니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야고보가 아모스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로부터 이렇게 되는 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한 이 배경의 말씀은 이사야 45:20~23절입니다. “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옛날부터 선지자들로 이미 말씀하신 내용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2:29~36절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이 임한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다윗 언약을 따라 오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할 줄 알고 따라갔던 베드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을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한 베드로가 이렇게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혈통적인 이스라엘의 왕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37~39절입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때에 39절을 보시면 분명히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먼데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흩어진 유대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한 내용 안에 예수님의 승천과 등극이 일어났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먼데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전하였습니다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환상을 보여주시고 주께서 명하셨는데도 주저주저 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도행전 15장의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말씀드리면서 사도행전을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이 임함으로 인하여 육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재건되고 제 삼 성전의 이야기들은 거의 다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하는 자들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습니다. 이미 사도들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그 날과 그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이 이 역사 속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종말의 확증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오늘 본문 37~39절입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의 임함이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는 이미 종말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어 성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도 성령이 임하여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입니다. 성령은 종말의 영입니다. 말세에 부어진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합니다. 노아의 때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삶의 목적으로 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일이 쓸데없는 일로 여긴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이 성이 멸망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긴 롯의 사위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바로 그날 까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갈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사람의 가치와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는 날까지 세상일에 바빴습니다. 홍수가 일어나기 일주일전에 방주의 문은 닫혔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른 징조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날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 때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그 날이 언제라도 기다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미 종말의 영이 임하면 세상이 끝난 세상임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사랑하는 그분을 기다리면서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일주일에 한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일주일을 살아갑니까? 공부를 하는 사람이든지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서 공부하고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이런 마음이 아니라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도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 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그 날을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