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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9-13 빚을 갚아 주소서!   2015. 4. 26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2)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2),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4년 전 수요일 저녁에 기도에 대한 주제설교를 하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제목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12절의 앞에 각주가 있습니다. 그 각주를 보면 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빚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오늘은 죄에 대하여 간단하게 보고 빚에 대한 말씀을 좀 더 보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나서 죄 용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죄의 용서를 구하는데 죄를 모르니 그저 윤리도덕적인 죄만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들어보니 죄가 가려져 있으면 응답이 안 된다고 하니 죄를 회개하는데 어떤 회개만 나오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런 것만 잘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야고보서 2:10절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율법이란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모두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교회에서 시키는 몇 가지의 일을 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모르고 행함을 강조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알고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를 위하여 그런 식으로 전한다면 이런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개념을 봅니다. 세 가지 범주로 인식하고 있는데 첫째는 회개하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돌아올 수는 있으나 용납되리라는 희망을 별로 가질 수 없는 이방인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수 있는 범주 밖의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셋째는 이방인들처럼 되어버린 유대인들인데 이들은 회개해도 소용없고 받아들여질 희망이 없는 자들인데 목동, 창녀, 문둥병자, 세리등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유대인의 죄에 대한 생각이나, 이방인이 서로 상대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판단자체를 예수님은 뒤 엎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 자체가 용서를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는 자리에 죄가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죄를 먼저 고백하고 그 다음에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니 그 자리에서 죄가 무엇인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를 받지 않으면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9-12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 아래 갇혀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도 없도록 불순종 아래 갇혀있습니다(11:3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들에게 용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여야 죄를 죄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율법의 의로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도 하십니다. 이들의 잘못된 의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 드러내십니다. 또한 행동으로 나오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동일한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옵니까?

 

마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청원하는 자들은 용서를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여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일어난 자가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성령님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의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죄를 상쇄시키려고 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다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 받아야 하는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먼저 용서하여준 대가로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내가 용서를 받아야만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이제 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은 나는 늘 주님의 용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의 죄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본문 12절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2)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2),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에 대한 각주가 헬라어로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말과 빚을 갚아 주세요라는 말을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달라는 청원입니다. 그런데 죄라고 하든 빚이라도 하든지 간에 우리가 먼저 용서하고 탕감해주어야 우리의 죄와 빚도 탕감하여 준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죄의 용서와 빚의 탕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우리의 죄의 용서와 빚의 탕감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없어도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말씀이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다는 이 말씀에 자기를 포함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나를 탕감해 준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할 수가 없기에 주님의 용서를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용서를 받았기에 그 용서를 이웃에게 증거 하게 됩니다. 이런 자가 참으로 자신의 죄와 빚이 탕감되었다면 그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복음 증거입니다.

 

로마서 4:4~8절입니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아브라함과 다윗이 증거 한 것은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조건으로 죄가 용서 받고 탕감 받을 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25:8~10절입니다.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매 칠년마다 면제년입니다(31:10). 매 칠년의 면제는 빚을 면제 해주는 것입니다. 동족이 종으로 팔렸다면 면제년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년은 가난해서 토지를 팔았으면 그 토지까지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물론 땅을 영구히 사고팔지는 못하기에 희년이 되기까지의 경작권만 계산하여 팝니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이 되거나 친척이 있다면 언제나 되 물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가망이 없는 자라도 제대로 안식년과 희년이 지켜진다면 모든 빚의 탕감이 일어나고, 빚으로 인하여 종으로 팔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하나님께 무상으로 받은 땅도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면제년과 희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땅이 연속으로 70년간 안식합니다(대하 36:2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은 안식년이나 희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안식년을 지킬까요? 유대학 연구소 이강근 소장의 글을 보았습니다. 현대판 유대인 '안식년'이야기입니다올해가 유대력으로 5775년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입니다즉 유대인들은 모든 농사와 생산을 중단하고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그렇다고 수백만 명이 먹고살아오던 농사를 짓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유대인들은 일반적인 안식년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은 방안이 있습니다최고랍비와 재무장관 증인 하에 유대인들의 땅을 한 아랍인의 손에 넘기는 일입니다이렇게 되면 올 한해는 유대인들에게는 소유된 땅이 없습니다땅은 그대로요 농사도 그대로 짓지만 남의 땅을 경작하는 격이 되지요. 물론 일 년 후에는 행정적으로 되돌려 받습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율법에 거리낌 없이 매 안식년을 넘기는데, 문제는 여기에 각자 집에 있는 정원은 포함되지 않는답니다그러니까 올해(유대력으로는 작년9월부터 올9월까지) 정원을 다듬으면 안 됩니다. 요즘 유대인 집집마다 겨울 우기를 지난 정원에 풀이 무성합니다요즘 재미있는 이야기가 돕니다. “어떻게 하면 과부를 소유할 수 있지?” 왜 과부가 필요하냐고요과부는 안식년에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부라도 있으면 정원을 가꿀 텐데요. 7년 안식년이 끝나는 마지막달이 다가오면 모든 유대인남자들은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워야 한답니다. 일 년 동안 가꾸지 않은 정원을 정리하려면요. 또 정원사들은 일이 넘쳐납니다이일은 국립공원이나 산림도 마찬가지랍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킨다는 현대판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면제년을 두고 희년을 법으로 두어도 그들은 교묘하게 다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대로 자신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결코 자신이 탕감 받을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1차 청중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빚진 자들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까? 오히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부동산 투기를 하였던 자들입니다(5:8). 예수님 당시에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12:40)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입니다(23:24). 이런 자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해석을 자기들에게 맞게 해석하여 그것을 전통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그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희년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시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자기들도 다 죄인이고 빚진 자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압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용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를 받은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죄를 짓지 않는 삶이란 예수님의 용서를 믿고 사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용서가 임한 자는 자신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간음한 자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죄하지 않으시고 대신 담담하심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빚만 아니라 다른 죄인의 빚도 탕감하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15절을 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이 말씀의 해석은 마태복음 18:21~35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냐 용서하여야 하느냐며 묻습니다. 일곱 번이며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앞에서 안식년과 희년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죄의 용서와 빚의 탕감은 죄인이 할 수가 없음을 성경이 밝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온전히 희년을 이루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자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종들과 결산하려는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한 종이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습니다. 1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면 6천일을 일해야 1달란트를 갚습니다. 일 년이 365일입니다. 65일은 쉬어야 하니 20년을 일해야 겨우 일 달란트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참아주시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빚을 다 갚아야 하는데 자신이 다 갚겠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인이 불쌍해서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탕감 받은 이 사람이 돌아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참아두면 갚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는 조금만 노력하면 갚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 임금에게 말하자 임금이 그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종을 옥에 가두고 다 갚도록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합니다.

 

이것이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사람의 능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든, 선행을 하든, 그 어떤 행위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 받아야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 받은 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용서 받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타인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타인을 용서할 수가 없다면 내가 용서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도 용서를 못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그 용서가 담겨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이 용서, 이 탕감을 우리가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탕감과 용서를 받은 것을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에 빚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빚은 갚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3:8~10절입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빚은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단지 율법이나 윤리도덕차원에서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면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자는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대가를 다 치렀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용서는 한량없는 용서이기에 결코 나의 어쭙잖은 회개라는 행위, 눈물의 통곡, 듬뿍한 헌금, 과도한 열심 등으로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용서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를 받았기에 죄의 빚이라고 하지 않고 바울사도는 사랑의 빚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빚은 갚은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 사랑을 받은 것이 복음이기에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1:14~17절입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사랑의 빚을 진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복음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행위로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것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복음 전하는 베드로와 바울의 자세와 태도를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을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일 사랑의 빚진 자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웃의 죄와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빚이 있어도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그런데 죄의 빚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런 자들을 탕감하여 주는 것은 오직 은혜의 복음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다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용서 받은 자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 용서가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빚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지고 있는 모든 인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히 그 죄의 빚을 다 탕감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사랑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고 이런 죄인인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의 십자가로 용서하시고 탕감하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빚진 것을 탕감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빚과 죄를 탕감하시고 용서하신 증거라고 증언하는 자들이 이웃의 죄와 빚을 탕감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