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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1~13 시험에 들지 않도록 2015. 5. 3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2)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2),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을 한글로 검색을 하면 106회가 나옵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도 있고(22:1, 16:4, 8:2,16)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시험하는 것도 있습니다(17:2,7. 6:16. 78:18). 그리고 마귀의 시험도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미혹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다른 말로 꾄다는 말이나 유혹이나 미혹의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꾀고 미혹하게 하여 망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은 심판과 구원 두 가지로 봐야 합니다.

 

역대하 18:19~23절입니다.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아합 왕을 심판하시는데 누가 아합 왕을 꾀어서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이때 한 영이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꾀어서 죽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이 영이 루아흐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례가 하나님의 영, 성령, 기운 바람 생명 등으로 사용됩니다만 같은 단어인데 헛된 것에 사용되기도 하고(26:18, 41:29, 2:11) 헛된 말(16:3)이나 헛된 지식(15:2)으로도 사용됩니다. 그 영이 임하여 사백 명의 선지자가 다 아합이 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가야는 그들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자 뺨을 맞습니다. 선지자 사백 명이 말하는 것과 한명이 말하는 것 중에 누구 말을 믿겠습니까? 아합은 사백 명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가서 죽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악한 자를 따라 능력이나 표적이나 거짓 기적을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고 표적과 기적들이 좋아 보이는 것은 미혹을 받아 심판을 받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한곳의 말씀을 더 봅니다. 야고보서 1:12~15절입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시험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시험이 구약의 용례와 같이 사용됩니다. 같은 단어인데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말씀도 되고 어떤 곳에서는 사단이 유혹하는 것도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단어를 해석하려고 하면 그 문맥을 통하여 보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성경이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하는지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 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12절을 보면 시험이라는 말이 신약에서 사용될 때에 유혹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하나님께서 연단하신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12절 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와 함께 연결되는 단어가 시련입니다. 시련은 성도가 연단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다 시련을 받습니다. 이 시련을 시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미혹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미혹이나 유혹은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를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는 시험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혹과 시험을 허락하신 것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사람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은 유혹이나 미혹이 아니라 연단입니다. 영어로 하면 ‘test’‘trial’입니다. ‘temptation’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미혹을 사용하시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혹을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잉태하여 이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의 근원을 하나님께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야고보서 1장의 이어지는 16~18절 말씀을 봅니다.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혹을 하여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죄를 낳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빛들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해야 빛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곧 구원의 복음입니다(1:13).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19:30). 그 영이 곧 말씀입니다(6:63).

 

이제 사람이 최초의 시험에 빠진 창세기 3:5절을 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사탄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처럼 될 줄 알고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싶은 그 욕심이 으로 아담과 함께 따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최초의 유혹이 하나님처럼 되는 유혹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다 이 유혹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시험 안에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자기 좋은 대로 행하시면 그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유혹에 넘어간 우리가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이라고 해도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이기에 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이라는 구조 속에 빠져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을 다 모아서 누가 보아도 희생적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 사는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빠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누가 탈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미혹된 세상에서 더욱더 시험에 빠져 들기를 원합니다. 시험에 빠져 드는 것을 세상은 성공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험받은 세상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께서 시험을 다 이기신 결과로만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4:1-11절입니다. “봉독 마태복음 4장에서 이 본문을 볼 때에 예수님이 받은 시험과 사람이 받는 시험으로 두 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그때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요한복음 6장과 연결하여 썩는 양식과 썩지 아니할 양식을 대비하여 썩는 양식만 있다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시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돌들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을 단지 길가에 많은 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말합니다.

 

신약의 헬라어를 구약의 히브리어로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헬라어의 돌들이 리도스인데 이 돌도 일반적인 돌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도 사용합니다(21:42, 벧전2:4,5). 그런데 이 돌 리도스가 히브리어로 에벤입니다. 에벤에셀 할 때에 그 에벤입니다. 신약처럼 이 돌이 일반적인 돌로도 사용되지만 모세의 두 돌 판이 역시 이 단어로 사용됩니다(24:12). 그러므로 마귀의 시험이란 율법의 조문을 생명의 떡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떡 곧 율법의 조문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자신의 십자가로 완성하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면서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돌 판에 기록된 율법으로 사는 것이 시험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생명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시험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3:1~6절입니다.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 판에 기록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는 것은 돌 판에 기록된 율법 조문으로 살면 된다는 것이 시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 판에 기록된 그 말씀을 생명인줄 알고 먹으면 그것이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을 지금 바울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할 때에 이 영이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63절에서 내 말이 곧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살과 피를 주신 것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든지 신약을 보든지 이 말씀들이 율법의 조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조차 율법의 조문으로 만들어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율법의 조문에 묶는 것이며 이것이 선악과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율법의 조문을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율법의 조문이나 신약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내어야 할 새로운 율법조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신율주의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서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3:7~18절입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법을 지켜내는 나는 선한 사람이며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악한 자로 규정하는 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예수 믿는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예수 믿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멋있어야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자꾸만 다른 것에 기웃기웃 거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이 간다면 시험에 든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가지 않고 다른 것들에 관심이 간다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시험은 마귀가 시편 91:11~12절을 인용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마귀도 말씀을 사용하여 유혹합니다. 성경에 약속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약속이 있기에 이 약속을 믿고 구하면 그대로 된다고 합니다. 그 약속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도 안하고 그저 내 욕망에 끼워 맞추어 성경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16절 말씀을 가지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 유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들고 나오거나 성경에서 자기 유리한 구절을 끌고 와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었을 때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14:22-23절입니다.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하나님의 영광과 출애굽과 광야의 이적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시험을 예수님은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조건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성경을 인용하여 유혹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런데 마귀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끊임없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귀의 시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런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동안 계시다가 부활하시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보여주실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천하만국의 영광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가진 것을 보십시오! 재벌 회장들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한국 최고의 재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준다고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자들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자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지 우리 주변을 보면 다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마귀에게 절하여야 그런 것이 주어진다고 하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혹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유혹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계속하여 오는 유혹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유혹이 어디까지 따라 옵니까?

 

그런 유혹은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따라 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마귀가 유혹한 그 유혹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른 하나님의 아들 됨의 표적과 증거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저주 받아 죽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이것이 유혹자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경에 있는 이런 말씀들이 이루어지게 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고 그 결과로 자기 백성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은 자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시험을 받고 이기시기 위하여 우리가 같은 혈과 육을 지니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모든 시험을 십자가로 이기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셔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 안에, 그 십자가 안에 사는 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