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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6~18 참된 금식 2015. 6. 24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 말씀을 대부분 이렇게 해석합니다.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기에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금식하는 티를 내지 않고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으로 알고 은밀하게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시니 마치 자기 소원을 금식하면 들어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어린 아이가 밥을 먹지 않고 무엇을 요구하면 부모가 들어준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의 능력 같은 책도 있습니다. 왜 금식을 해야 하며 금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레위기 23:26~32절입니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2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위기 16장에 더 상세한 속죄일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유대력으로 일곱째 달 열흘날이 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대 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제사장을 위하여서도 수송아지를 잡아 속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수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의 피는 지성소의 언약궤에 뿌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속죄를 마치고 난 후에 산 염소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킨 후에 광야로 보내어버립니다. 이러한 대 속죄일의 속제를 단번에 영원히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9:23~28절입니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만이 아니라 대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피를 들고 지성소에 가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 전체가 예수님의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였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대 속죄일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으로 나타나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속죄일의 규례에 대하여 이 날이 레위기 16장에서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다 안식일 규례로 지켜야 하는데 속죄일은 금식을 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는 노동금지입니다. 일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20:8~11)과 구원의 선물(5:12~15))을 일한 것도 없이 값없이 받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 속죄일의 경우에는 다른 안식일과 다르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16:30). 그러므로 이 날에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하고 안식하지 않으면 백성에게서 끊어진다고 합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인데 9일 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온전한 하루입니다. 왜 이 날을 안식일 중의 안식일 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창조와 구원의 선물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은 누가 대신 속죄를 해야만 주어지는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에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금식은 왜 해야 합니까? 사람은 음식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날 금식을 통하여 우리가 밥을 먹고 내는 혈과 육의 힘으로는 결코 속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였다는 그 자체로 속죄가 되거나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속죄에 있어서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금식이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홀로의 희생을 통하여 속죄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자기 아들의 희생의 공로만 높이십니다. 이러한 속죄일만 아니라 광야 40년을 통하여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가르치신 것입니다.

 

신명기 8:1~3절입니다.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 40년 동안 이 훈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게 되면 자기들의 능력과 자기들의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을 주셨는데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이루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오히려 이방인의 사고방식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위하여 금식과 안식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금식은 이러한 뜻의 금식도 있지만 이와 정 반대의 금식도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보시면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세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이 온 백성에게 금식으로 명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2~15절입니다. “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3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14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그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이 응답 후에 찬양대를 앞세워 적을 맞이하는데 적들이 서로 찔러 죽임으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브라가 골짜기 찬송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금식을 하고 찬송을 했기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른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 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대 속죄일의 금식과 안식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상 21장을 보면 아합왕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금식 일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땅은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자기 왕궁 곁의 나봇의 포도원을 나봇에게 팔라고 하니 나봇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금식 일을 선포하게 하고서는 나봇이 여호와와 왕을 모독하였다고 모함하는 두 증인을 세워 죽여 버립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하여 금식을 선포하여 여호와의 거룩한 일로 위장하여 나봇을 죽인 것입니다. 거룩한 금식 일을 선포하여 놓고 이런 짓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합과 이세벨이 비참하게 죽어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고 이세벨은 개들이 뜯어먹어 버립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금식까지 하게 되는지 계속하여 봅니다.

 

스가랴 7:1~6절입니다.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그들이 하던 금식을 지금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 여러 해 동안 오월에 금식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억하면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금식을 하였을 것입니다다. 그런데 이제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계속 금식하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한 것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금식을 하거나 먹고 마시거나 간에 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금식조차 자신들을 위하여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온갖 금식기도들이 다 나옵니다. 심지어 40일 금식기도를 몇 회 하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금식을 합니까? 자기의 소원을 이루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잘해보겠다고 하는 것도 결국 자기를 위한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대 속죄일에 금식을 명하신 것처럼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이나 속죄를 받을 수가 없다는 자기부인의 금식이 아니라 금식을 하고 스스로 금욕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것이 탐심이라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사야 58:1~5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1 "목청껏 소리질러라. 네 소리, 나팔처럼 높여라. 내 백성의 죄상을 밝혀 주어라. 야곱 가문의 잘못을 드러내어라. 2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 3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4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 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5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야훼가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공동 번역이 엉터리 금식에 대한 고발을 더 잘 표현하였기에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입니까?

 

6~7절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말씀만 아니라 구약의 희년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제도를 개선하거나 물리적인 해방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자기 사도들에게 부어주시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골로새서 3:10~11절입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이 복음을 증거 될 그 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분리가 철저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도들도 넘기 힘든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과 자유인이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이 사회질서를 요란하게 하는 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미 이 땅에서 기득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런 기독교는 성경의 복음과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이사야 58장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내용만이 아니라 이사야 61장의 희년의 내용도 다 이루어내셔야 합니다. 이사야 61: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씀의 성취를 봅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과 희년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성취가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의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가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냄을 받았고 엘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지만 이방인 나아만만 고침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의 선택에 대하여 이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모습이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이방인과 세리와 창기와 어울리는 예수님이 죽어 마땅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하는지 봅니다.

 

누가복음 5:30~35절입니다.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사야 58장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이사야 61장의 희년을 지금 예수님께서 세리에게 이루고 계십니다.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세리를 천국잔치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시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천국잔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율법으로 철저하게 정죄당하는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을 해방시키시는 참된 금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은 자주 금식을 하고 바리새인들도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혼인집의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천국잔치를 벌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그 때는 금식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금식은 언제하면 됩니까?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 금식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사느니 차라리 굶어죽겠습니다. 이런 자세의 금식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돌 판을 받아오는 40일 기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는 40일을 금식하면서 돌 판을 받아 왔는데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경배하면서 먹고 마시며 뛰 놀았습니다. 이때 돌 판을 깨뜨립니다. 돌 판이 깨어지지 않으면 그들이 다 죽게 됩니다. 다시 돌 판을 받아오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언약하였기에 약속에 땅에 들여놓기는 하겠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려면 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올려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사느니 차라리 굶어죽겠습니다. 이것이 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만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과 창기들도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러자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마태복음 11:18~19절입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2)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 요한이 자주 금식을 하니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참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정죄당하는 그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하여 죄의 멍에를 풀어주시고 참된 생명의 양식을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옳다고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합니다. 여기 행한 일의 2)라는 각주를 보면 다른 사본에 자녀들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지혜의 일인데 그 자녀들만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려고 오시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이일을 알아보는 자는 지혜의 자녀들만 알아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참된 금식이 무엇인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참된 금식을 하신 자리가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은 죄와 사망에 매여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그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 참된 금식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참된 금식이란 이사야 58장의 말씀처럼 죄와 사망에 매여 있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이러한 금식이 우리에게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