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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 비판하지 말라 2015. 6. 21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절망하게 합니다. 말씀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았다면 말씀을 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 중에 하나라도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지켜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 중에 자신이 말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 내신분이 계시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한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죽은 자로 드러나는 것이 자신을 제대로 아는 자가 됩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은 어떻게 적용시키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서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 상생하면서 살자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은혜롭게 넘어가자는 말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일단 이렇게 적용을 해보아도 우리는 평소에 남을 비판합니까? 안합니까? 늘 비판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할 때에 비판의 기준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관의 판단을 가지고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나온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우리가 비판을 하게 되면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헤아리게 되면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헤아렸을 때에 우리를 비판하고 헤아리는 분은 누구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고 헤아리십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남을 헤아리고 저울질하고 정죄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인데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남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선악과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 자기들이 하나님 된 것처럼 모든 것을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비판하는 자들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 자들입니다. 들보란 서까래를 말하는 것인데 서까래가 어떻게 눈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기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모르고 남의 아주 작은 허물과 죄를 비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을 볼 때에 남을 잘 비판하고 판단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 눈에 들보 곧 자기 안에 죄와 허물들이 가득하기에 상대방의 작은 죄와 허물들이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 들보가 빠져야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일차 청중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과 그 무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 시대는 율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대입니다. 율법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이 고발을 당함으로 자기 자신에게는 율법을 지킬 어떤 가능성도 없음을 알고 율법 외에 나타날 하나님의 한 의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고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 율법으로 자신들의 죄를 본 것이 아니라 남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정죄하고 판단하는 세리와 함께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의 감사가 어떤 감사입니까? 세리를 정죄하면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누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란 자신의 죄를 알라고 주셨는데 그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율법을 받은 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로 다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제일 앞자리에 않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은데 꼭 설교마칠 때 쯤 뒤를 돌아봅니다.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마태복음 12:1~8절입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판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은 다윗이 성소의 떡을 먹은 것을 말씀합니다. 성소의 떡은 제사장만이 먹는데 다윗과 그 일행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안식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드리기 때문에 물려낸 것이 있다는 것은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24:8). 물론 안식일에 그 떡을 다 먹지 않았다면 다음 날에도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안식일 말씀에 비추어보면 다윗이 제사장이 먹는 떡을 안식일에 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일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안식일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 날짜만 지킨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안식일에 일하시는데 이것을 정죄하고 비판한 자들이 율법의 의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어지는  9~14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옳은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고 하시면서 그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를 의논합니다. 비판과 정죄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살해하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2: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로마서 2:1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앞의 1장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바로 앞의 말씀을 보시면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 버려두시면 어떤 죄들이 나오는지 목록만 살펴봅니다. “29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모두가 죄인인데 이런 죄를 행하면서도 서로 서로 옳다고 하는 자들이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이방인은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안에서도 율법을 누가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로 다시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곧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옳다고 여기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와 자비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고집스럽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평소에 판단을 잘하며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성경에 판단하고 분별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아주 많은 곳에서 바르게 분별하고 대적과 싸워야 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잘 판단하여 쫓아내어야 할 자들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들을 잘 분별하여야 하는 말씀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을 판단하라고 하는지 한 곳의 말씀만 찾아봅니다.

 

고린도전서 6:1~7절입니다.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까지 판단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형제끼리 이해관계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세상의 법정에 고발을 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사도가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세상과 천사를 판단할 성도가 어떻게 그런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 못하여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세상의 법관들에게 교회 재판을 맡기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크건 작건 간에 나에게 이해득실의 문제가 있으면 우리의 머리는 슈퍼컴퓨터보다 더 빠르게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판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용서 받고서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멱살을 잡고 옥에 넣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행위가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12절입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 있어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고기는 이방제사에 쓰였던 것이기에 먹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다른 신은 없기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먹는 사람은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자는 거리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다면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자를 받으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형제로 교제할 수 있다는 기준이 아주 간단합니다. 전적타락과 전적은혜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저는 형제로 받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나와 좀 다를지라도 주님께서 용납하셨다면 내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저렇게 비판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날을 생각한다면 심판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형제라고 받는 자는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말을 그렇게 형제라고 하면서 비방하고 비판하고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어 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고 비방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판과 비방과 판단이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것을 알지만 이런 비판과 판단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고 그 이루신 의의 선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가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영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십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 받았음도 압니다. 이런 자들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형제의 잘못을 보게 된다면 정죄하기 보다는 내가 저 사람의 입장에 있었다면 더 교묘하고 더 악하게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용서 해주신 예수님만 보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방과 비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 용서의 크심에 감격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7:36~50절입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동네 사람이 다 아는 죄인이라면 이 여자는 창녀였을 것입니다. 은밀한 죄는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는 예수님께서 나아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향유를 그 발에 붓고 입 맞추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바리새인이 속으로 비판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죄인인지 알 것이고 알았다면 죄인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대로 둔다고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지옥 갈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습니까? 죄의 삯을 사망입니다. 크고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판단하고 이웃을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판단하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살해한 것이 죄입니다.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다면 이제 그 어떤 누구도 정죄와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 눈에는 예수님의 용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4:1~5절입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만났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런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벼운 일이 됩니다. 그리고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일임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을 충성임으로 알고 주님 오시기까지 모든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자신은 맡은 일에 충성할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날에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태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그 용서받은 여인처럼 용서 받은 바울처럼 남의 판단이 아주 작은 일로 여겨지며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 그 십자가의 용서를 맛보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