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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3~14 좁은 문과 넓은 문 2015. 7. 12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말씀을 보시면 두 문만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며 넓은 문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은 많고 생명의 길로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생명의 길은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은 길도 좁고 험하지만 넓은 문은 길도 넓고 편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해석하여 온 역사도 2천년이나 됩니다. 아마 2천년 동안 이 말씀의 설교를 모아서 듣는다면 평생 들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가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무엇입니까? 길에 대하여 잠언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16:25)” 사람들이 보기에는 생명의 길로 가는 것처럼 바르게 보이는데 그 마지막이 사망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길은 생명의 길일까요? 멸망의 길일까요? 사람들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따라갑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만이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이단이 아니라고 자신들은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옳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놀러가는 일요일에 우리는 주일을 성수하기 위하여 예배를 참석하는 것을 좁은 문 좁은 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일 오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더 좁은 문 좁은 길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수요일 모이는 사람은 더 좁은 길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합동 교단에서 여름성경학교 주제가 주일성수입니다. 어떤 교수는 한국교회의 침체의 원인을 주일 저녁 예배를 오후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는 곳은 자기들은 지금까지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온 것이 옳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는 것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선교와 헌신과 봉사와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열심히 동참하는 모든 것이 다 좁은 문 좁은 길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며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상이 크다고 합니다. 이런 길이 좁은 문 좁은 길일까요?

 

제가 경기도 모임에서 한 가정이 어떤 곳에 있다가 나왔는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자매 두 사람이 합동교단 목사가 친척인데 그곳의 교회에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얼마나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간 훈련시킨 것처럼 3년 동안 아무른 일도 못하게 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훈련만 받게 하였습니다. 이런 곳에 남동생도 갔고 어머니도 갔습니다. 그곳에서 영적인 훈련을 한다면서 형제간이라도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지적을 하면 그 형제와 말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것이 전이가 된다고 말도 못하게 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답니다. 전에 설교시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그 방대한 로마서와 에베소서 강해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을 다 독파했다는 자매입니다. 지금은 온 가족이 복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수요일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또 들었습니다. 마산의 어느 교회 여 집사가 자신이 성경을 통달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밀양의 한 수련원을 구입하여 들어갔습니다. 제가 경기도에서 말씀드린 그런 내용보다 더 혹독한 율법적인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몸이 아프면 영적으로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서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못한답니다. 그리고 영적인 서열화가 있어서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아주 열악한 환경에 내 몰아 넣고서는 접촉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심지어 외부의 차량이 그 수련원을 지나가면 영적으로 더러워진다고 철조망으로 길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이런 곳에 8년을 있다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쫓겨난 가족이 있습니다. 쫓겨나면서 무어라고 했는가 하면 여기서 나가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자기들은 아주 질이 높은 구원을 받는 자들이지만 세상에서도 몇 몇 교회는 겨우 강도 같은 구원을 받는 그런 교회가 있을 것이니 그런 곳을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7년 전에 그렇게 나와서 밀양에서 살고 있는데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도 듣고 저의 설교도 들었다면서 찾아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곳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이 말씀을 문자대로 적용하면서 자신들은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입니다(고후3:6). 이러한 말씀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그들에 의하여 세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좁은 문 좁은 길이며 생명의 길이라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벗어나면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 그런 집단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용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의 길로 가는 것입니까? 내가 주체가 되어 생명의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서 나는 기어이 생명의 길로 가야겠다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다 구원욕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구원욕구가 다 있습니다. 이런 구원욕구를 채워주겠다고 나오는 것은 종교라는 말입니다. 종교(宗敎)란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근원적이고 뛰어난 가르침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라는 곳입니다. 신을 말하고 신의 경전을 말하면서 그 경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면 구원을 준다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한 교리를 충족시키면 천국을 간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이야기는 거저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이 열심을 내어 보암직한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보암직한 건물도 세우고 사람들이 칭찬할만한 사회적인 사업도 많이 하면 교회가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넓은 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자기 단체에 오면 구원을 보장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복은 덤이고 영생까지 준다고 합니다. 구원이 사람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곳이 다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입니다. 거듭남과 죄 사함의 비밀을 말하는 곳이나 그런 곳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바른 신앙을 전하는 곳이라고 하거나 간에 사람이 어떤 방법을 제시하고 그 길을 가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가짜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증거 합니까? 성경을 부분적으로 따오거나 문자적으로 보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많습니다. 흔히 전도지에서 사용하는 요한복음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13절에서 이렇게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셔서 거듭나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하기 나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신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이 두 곳의 말씀만으로도 모든 종교는 다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안의 넓은 문인 종교성이 집요합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하여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그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영원하신 언약이 역사 속에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이 복음이란 사람의 행위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좁은 문 좁은 길을 가셨기에 예수님이 좁은 문 좁을 길이십니다. 이것을 구약 전체가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홍해 앞에 왔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우성입니다. 뒤는 애굽 군대입니다. 앞은 홍해입니다. 사람들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지팡이를 바다로 펼치니 바다에 길이 생겼습니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것이라고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홍해를 건넌 이들이 길이 없는 광야와 사막을 따라 40년을 갑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넙니다. 역시 길이 없는 곳으로 갑니다. 약속의 땅은 길이 없는 곳을 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이 이끌어서 가게 되는 길이기에 사람이 찾지 못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끌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시대를 지나 왕들의 시대에 들어왔지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이조차 로마에 의하여 다 파괴되고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좁은 문 좁을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로 목숨 걸고 따라가겠다고 나선 제자들도 다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고 따라가야 하는데 십자가 앞에서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므로 그 좁은 문인 십자가로 가는 길은 아무도 갈 수 없고 예수님만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하여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이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갈 수 없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신약에서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 길로 걸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로 걸어가셨기에 너희도 잘 보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가는 것은 항상 앞길이 막막합니다. 길이 없어 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이러시는가 하는 마음이 들도록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가 모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렇게 매달려 죽는다고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게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종교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 좁은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만 좁은 문 좁을 길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예수님이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2008년도에 누가복음 설교를 하면서 죽음으로 연 새길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얼마나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좋은 세상 만들려고 공산혁명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살신성인의 길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입니다. 이런 휘장은 사람이 손으로 찢을 수 없는 아주 튼튼한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일 년에 단 한번 대 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들어가는 대 제사장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죽임을 당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10:19-25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짐을 통하여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어두움의 갇힌 세상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다만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보탬이 되는 신이라면 믿어주겠다는 것이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고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여도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죽은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전도지를 보면 이 세상과 천국을 그려놓고 그 가운데 큰 절벽을 그려놓습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윤리와 도덕이나 종교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십자가를 다리처럼 그려놓고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이 다리를 건너간다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결단하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지고 이것은 하늘로 가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열린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부활 속에 생명 속에 집어넣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익혀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의 해석을 내가 여기 있고 대상이 저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 대상은 당길 수도 있고 밀쳐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란 예수님의 죽으심만으로 되는 길이기에 그 길에는 사람의 공로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에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갑니다. 이 흉패에는 12개의 보석이 달려있습니다. 12개의 보석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대 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가슴에 안고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소에는 이런 짐승의 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기 피로서만 만들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죽으심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여신 것을!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기에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을 죽어있는 자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제 내가 길을 열어놓았으니 나를 따라오라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자기 백성들에게 덮쳐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덮쳐 온 자들은 세상이 볼 때에 죽은 자로 보이지만 이들이 영원히 산 자가 됩니다. 이들은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신 자리가 십자가 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은 문 넓은 길 곧 멸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나의 의라고 믿는 것은 일체의 자기 의가 부정당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이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육체의 길이 율법주의의 길이며 성령의 인도가 십자가만 바라보이는 길입니다.

 

요한계시록 3:7~13절입니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길이며 진리이시며 생명입니다. 또한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22:22). 예수님이 문이신데 그 문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사탄의 회당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 몇이 네 발아래 절하게 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합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주의자 몇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니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며 생명이며 양의 문임을 믿는 자들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 좁은 길 곧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합니다. 일체의 자기 행위를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넓은 문 넓은 길 그래서 멸망의 길은 끊임없이 사람의 행위와 가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멸망의 길입니다. 이 길이 얼마나 넓은지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자기부인이라는 십자가로 끌고 가십니다. 그 길이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길이 아니라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십자가라는 좁은 문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