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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5:18~21 성령으로 충만함 2013. 11. 24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술에만 취한 것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것도 술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방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사랑하면서 사신다면 이것이 방탕한 삶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세상의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신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에 와서도 구하는 것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면 이것이 방탕하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보기 전에 먼저 방탕하게 사는 것과 방탕하게 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1~3절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3절이 방탕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이방인의 삶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예수 밖의 사람이며 성령 밖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삶을 옳다고 여기면서 살던 방탕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어떻게 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방탕한 삶에서 십자가 안으로 들여놓으셨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고난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탕한 삶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그 가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좋게 말로 해서 멈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하여 브레이크를 걸어주십니다. 그리고 돌이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이제 우리 육체의 남은 때를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4~11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전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을 해야 합니다. 왜 너는 방탕하게 살지 않느냐는 비방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향락, 무법한 우상숭배 이런 것들이 온 세상의 일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함께 하던 자들이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예수 믿더니 미쳤다는 그런 말을 듣고 사십니까? 그러나 그런 자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 앞에 직고 할 날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8~11절입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이렇게 사는 방탕하게 살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세월을 아껴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십 시간을 다 말씀드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성령의 충만함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충만함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성령의 역사라든가 성령의 충만함에 대하여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하비콕스가 한국의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보고서는 한국의 성령운동은 샤머니즘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토착적인 종교란 샤머니즘입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이든지 다 있습니다. 무당이 입신하여 작두도 타고 영험한 능력을 보이는 것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래서 성령도 마치 이런 신적인 능력으로 봅니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좀 열심히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령을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자들이 집회를 하는데 이초석이라는 사람의 집회를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책을 쓴 퍼시 콜레라는 사람을 초청하여 그를 넘어뜨리고 일으키는 쇼도 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능력인양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오순절계통에서 이러한 운동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온갖 성령운동들을 한 곳이 서울의 순복음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을 한다, 병을 고친다, 귀신을 쫒아낸다,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들도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많은 신학생들이 롤 모델로 조용기 목사를 택한 자들이 저의 주변에서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들은 말씀대로 한다는 자들은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순복음 교회나 사랑의 교회들이 이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습니까? 이미 신문과 인터넷 뉴스와 시사지까지 다 보도가 된 내용들인데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이런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피하여 가려고 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제2의 축복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나서 말씀을 따라 신앙 생활하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고 가난한 신앙생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제2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 이런 문제들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청년 때에 지금 울산에서 목회하는 정근두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장유 수양관에서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고신의 교단 정책과 달리 조심스럽게 제2의 축복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성령의 세례와 제2의 축복에 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이 안 되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가난한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저의 이 질문도 나의 구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성령의 충만함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라는 헬라어가 ‘엔 프뉴마티’입니다. ‘엔’은 ‘~안에서’ 라는 말도 되고 ‘~으로’라는 말도 됩니다. 성령 안에서 충만 과 성령으로 충만의 느낌이 다르지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충만해도 말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씀도 성령에 의하여 성령으로 충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된다고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자꾸만 성령만 충만하게 되는 것으로 보고서 성령의 충만함을 마치 무당의 신접한 것처럼 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保惠師) 곧 성령입니다. 다른 이름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오시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데 이는 진리의 영이라서 세상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보지도 알지도 목합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만 우리가 그를 알게 되는데 그는 그 자신을 증거 하지 않고 아들을 증거 합니다.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임하고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성령이 임하였다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 15:26~27절입니다.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제자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무엇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에베소서 1:13~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이 성령으로 도장을 찍고 성령께서 보증금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 소유권을 보장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치심이 있는 자는 반드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을 치시고 성령의 보증금을 지불하셨기에 이러한 성도에게는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성령으로 충만 해지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기에 그 아들로 충만한 것이 성령의 충만 입니다. 그리고 ‘충만’이라는 말도 무엇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끝 날까지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23절을 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오늘 제목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바로 그리스도로 충만함임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는 말씀은 곧 그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충만해지는 내용이 에베소서 1:15~22절입니다. “봉독” 바울 사도가 기도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충만해 지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문자로 전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으로 전하여집니다.


요한복음 6:63절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이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알게 하시면 이것이 바로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서 들어오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였기에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말씀의 충만함입니다. 


에베소서 6:17절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성령이 곧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늘 본문 18~19절을 봅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말씀 충만 과 성령 충만의 결과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여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