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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8~21 성령 충만의 결과 2013. 12. 15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동안 성령으로 충만함에 대한 내용을 세 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떠한 결론이 나오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물론 오늘 드리는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의 전부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19절 상 반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성도들이 모여서 서로 화답하는 찬송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찬송은 꼭 노래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말로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이 찬송(讚頌)이며 찬양(讚揚)이 됩니다. 물론 구약의 시편들을 찬양하기도 하였지만 서신서의 여러 부분들은 초대 교회 때의 찬송으로 불러진 내용으로 보기도합니다. 성경 밖의 자료로 1세기 말 로마제국에 속한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찬양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도가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이것은 노래로만 화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일들을 서로 말하는 것이 화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화답은 세상이 결코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인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과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혼자만 담을 쌓고 교회당에 다닌다면 종교 생활하는 것이지 복음적인 신앙의 형태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내용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절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내 하나 지옥에 안 가고 천국 간다는 그런 개념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몸은 한 지체만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의 지체들이 서로 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 지체가 서로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자기 혼자 신비체험을 하고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5~27절을 봅니다.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들은 서로 분쟁하지 않고 여러 지체가 서로 돌보며 한 몸을 세웁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왜 분쟁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아직 육신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이론들과 생각들이 덜 부서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신 자들을 반드시 그 모든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야 마십니다. 이렇게 복종시키시는 일을 교회라는 곳에서 하십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통하여 결국은 나의 자아를 깨기 위하여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19절 하 반절에서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한다고 하기에 이것도 노래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기 혼자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한 성령을 마시고 서로 한 몸으로 화답하는 자들이 이제 주께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예배란 성도가 서로 화답하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예배란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이 함께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한 성령을 마심으로 서로 화답하면서 한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20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범사에 감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범사에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자기를 위한 구원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만 섬기기로 언약하고 쌍방에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오는 40일 동안 그들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 하여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한 신을 요구하여 만들어 낸 것이 우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였지만 나를 위한 구원에만 머무른다면 이것은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결론에서 다시 보겠습니다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몇 번 말씀을 드린 내용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의 결과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는 결과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곧 말씀 충만함인데 그 결론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피차 가르치는 것입니다. 피차 가르친다는 것은 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 한 몸이 되었기에 서로 세워가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돕는 지체가 된 것입니다.


넷째,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면 피차 복종하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함의 결과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가 얼마나 경외할 분인지 디모데후서 4:1~4절을 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바울사도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지를 말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위엄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시면 장차 재림하실 주님을 우리가 알고 믿는 다면 피차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피차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권면하게 되고 피차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특정한 성령의 은사가 있다는 자들이 무조건 자기 말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나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며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공갈협박을 하는 자들이 성령 운동한다는 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이 무엇인지 이미 보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을 증거 하고 성령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성령을 부리는 자들처럼 자기 말에 복종하라고 하는 자들이 다 엉터리들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피차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라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에 피차에 복종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요3:34).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내가 왕 노릇 하려고 합니다. 모두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하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9~11절입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누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성령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이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께 무릎 꿇게 됩니다.


히브리서 2:8~9절입니다.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다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지만 아직 그렇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믿는 자들은 이미 만물이 주께 복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7절입니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뜻은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복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아들 자신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며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으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혼자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도의 교제만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며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해체되고 삭제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이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수어 내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가 부인되어 지고 깨어져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