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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5~8 종들아! 2014. 2. 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성경을 볼 때에 숲도 보고 나무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떻게 성경전체와 연결이 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부관계와 부모자식관계를 보았고 이제는 종과 주인과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단지 인간관계를 잘하자는 그런 운동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들이 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머리를 넘겨받은 교회라면 이러한 관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시작되는 앞부분을 봅니다.


에베소서 5:8~6:4절입니다. “봉독” 성도는 전과 이제가 있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는데 이제는 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들로 살아갑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여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사는 것이 기도원에 가서 불 받아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교회 일에 몰입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아내가 교회일 한다고 집안일도 돌아보지 않고 다니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라 출근하는 남편 따뜻하게 밥해주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아내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그렇게 하는 아내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하기에 자기 자랑이 나오지만 성령으로 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보다 세상의 명예를 위한 성취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배웁니다. 또한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식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을 통하여 역시 교회와 그리스도의 비밀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본문 5절을 봅니다. 종들을 부릅니다.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로마제국에 약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육체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의사, 교사, 행정가 같은 교육받은 자들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종들은 세습이 되고 손으로 사고팔며 그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전쟁 포로로 끌려와 종이 됩니다. 이런 노예제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사회이기에 노예란 살아 있는 도구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사도는 노예를 언급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됩니다.


5절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고 떨라는 것은 무서운 사람 앞에 벌벌 떠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공경하는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바울서신에서 사용되는 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하는 경외감을 말씀합니다(고전2:3, 고후7:15, 빌2:12). 그러므로 종이 육체의 상전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는 것은 마치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보았던 남편과 아내와 자식과 부모에게 주시는 말씀과 다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생활하는 인간관계가 가정과 사회입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란 전쟁의 포로로 잡혀왔거나 빚으로 팔려왔거나 부모가 노예이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인 경우에 노예의 주인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그렇게 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공산주의의 집단농장이 왜 망한 것입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것으로 더 많이 돌아오지 않기에 대충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들이기에 인간의 근원적인 탐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주아를 물리치고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으면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이 자본주의가 선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탐심을 인정하고 재산의 사유화를 인정하였기에 이나마 살아남아있지만 이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심에 바탕 하기에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로마시대의 노예, 조선시대의 노비, 공산사회의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근로자나 간에 자신의 자리에서 정말 육체의 상전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과급이 있기에 죽기 살기로 일하며 남을 짓밟아야 자기의 성과가 높아지기에 그렇게 열심히 하지만 로마시대의 노예라면 어떻게 주인을 대하는 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합니다.


6절을 봅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을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합니다. 노예란 주인이 볼 때에는 하는 것처럼 합니다. 눈가림만 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부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역에 끌려간 사람들은 일을 눈가림만 합니다. 그래서 매를 들거나 할당량을 배당합니다. 이렇게 끌려간 경우에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함께 끌려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개혁하고 노예해방운동을 해야 마땅할 텐데 그런 말을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과 세상의 질서에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 시대가 로마가 다스리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빌레몬서 1:10~16절입니다.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사도가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합니다. 지난주 부모들에게 주신 말씀에 자식을 낳는 자가 부모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사도가 도망친 감옥에서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노예를 육체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에 필요한 심복이지만 육체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허락을 받기 위하여 빌레몬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종 이상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사랑받은 형제로 두라고 합니다. 앞에서 로마시대의 노예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시대에 노예제도를 혁명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예나 노예의 주인이나 간에 복음으로 사람이 바뀌어 짐으로 노예와 주인이 사랑하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놀랍게도 사회의 제도들이 바뀌고 신분의 제도가 바뀌어 집니다. 이것은 제도를 바꾸거나 혁명을 일으켜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한사람이 복음으로 바뀌어 짐으로 사회적인 제도들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된 것은 혁명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몇 곳에만 개봉하였습니다. 이 영화에 어매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 뉴턴의 이야기가 조금 나옵니다만 실제적인 주인공은 윌리암 윌버포스(1759~1883) 이야기입니다. 존 뉴턴은 노예상인이었다고 회심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지만 윌리암 윌버포스는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평생에 그의 신앙양심으로 노예제 폐지를 위하여 활동하여 결국 노예제 폐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노예해방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도 노예해방을 하였지만 이것은 정치적이 선택이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의 싸움에서 노예해방은 북군에게 유리하였기에 링컨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이런 정신에는 복음의 정신이 있어서 노예해방을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흑인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미국은 얼마나 엄청나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이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국에서 그런 차별을 받아놓고서도 지금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종들 곧 노예들이 자신의 신분을 바꾸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노예로 평생을 살아도 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 노예의 자리에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으로 살든 주인으로 살든 남자로 살든 여자로 살든 그가 처한 그 삶의 현장에서 정말 그리스도를 믿고 사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22~25절입니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종이라도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주인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것과 똑 같이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노예라도 자유인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1절입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환들이 종입니다. 이들이 선하과 관용하는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범사에 두려워하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며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20~24절입니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4)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1절에 4)라는 각주가 붙어있을 것입니다. 그 각주는 어떤 사본에서는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맥상 저는 이 사본을 지지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주인, 할례나 무 할례가 의미가 없습니다.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에 사람들의 종의 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노예가 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인이기에 지금 세상의 신분과 지위를 한탄하지 말고 오히려 육체의 상전을 그리스도께 하듯이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이 세상이 감당 못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진리로 자유롭게 된다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