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2:1-5 생명수 강 2010. 4. 25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오늘 말씀에 생명수 강이 나옵니다. 강 이야기 하니 4대강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한쪽은 강을 살린다고 하고 한쪽은 강을 죽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강물은 흘러야 물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오염물질이 강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맑은 물이라도 흐르지 않고 인공적인 보를 만들어 가두어두면 물이 썩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번 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도 물에 대하여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물은 일정합니다. 물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구가 일 년에 8300만 명씩 늘어나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하루 마실 물을 긷기 위하여 5시간씩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물의 부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오염입니다. 왜 물이 오염되는 것입니까? 인구가 모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흩어져서 살면 물이 정화가 되는데 한꺼번에 오수가 나가니 정화가 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설거지에 합성세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건더기는 짐승의 먹이로 사용하고 나머지 허드렛물이 버려지는 곳에 미나리 밭을 만들어놓습니다. 미나리 밭을 지나는 물은 이미 깨끗한 물이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온갖 합성세제로 물이 오염됩니다. 공장폐수와 가축의 배설물까지 물에 유입이 됩니다. 우리가 배설한 물도 결국 돌고 돌아서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고 살 물이 이렇게 오염이 되는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어느 영어 선생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이스라엘이 왜 황량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헤르몬 산의 이슬이 말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범죄 하면 하늘의 이슬이 그친다는 말씀은 몇 곳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비와 이슬을 멈추게 하는 것(왕상17:1)과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미루고 있었을 때에 이슬이 멈추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학1:10). 이스라엘의 물 부족만 범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물의 오염이나 물의 부족도 역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생명수는 이런 물과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물은 우리의 육체가 살아가는 일에 절대필요한 물에 대한 말씀이지만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오염되지 아니한 좋은 물을 마셔도 그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진 사람이기에 생명수가 말라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수가 끊어진 것은 결국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 2:8-14절을 봅니다. “봉독”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는데 그 곳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그 중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오는데 첫째가 비손입니다.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고 그 땅의 금은 순금이며 그곳에는 베덜리엄과 호마노도 있었습니다. 이런 보석이 새 예루살렘에 있었지요! 둘째 강은 기혼이지만 이 강은 첫째 강과 함께 흔적이 없습니다. 셋째와 넷째는 지금도 그 강 이름이 있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에덴에서는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은 아무리 강을 개발하고 마실 물을 마련하지만 또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가 무엇인가 하면 예레미아 2:13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아모스8:11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러므로 생명수 되시는 쪽에서 생명수를 공급하여 주시지 않은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늘 갈증을 느끼며 살다가 영원한 갈증을 느껴야만 되는 지옥에 갈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의 실상이 어떤 곳입니까? 부자가 죽어서 눈을 떠보니 부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보니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하여 손끝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였지만 이곳과 그곳은 단절되어 있기에 건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동안에 영원한 생명수를 발견하고 마시게 된다면 이 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수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였습니다. 요엘서 3:18절입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심판과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 회복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중에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 47:1-12절입니다. “봉독” 완성된 성전 동쪽 문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전의 동쪽문은 여호와를 위한 문입니다. 그 물이 점점 많이 흐르게 되는데 그 물이 흐르는 곳 마다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특히 12절을 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생명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런 환상을 보고나서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70년이 되어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성전을 재건하여도 성전에서 생명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가 또 예언을 합니다. 스가랴 14: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의 한 날이 낮도 아니며 밤도 아닌데 어두워갈 때가 언제입니까?

 

마태복음 27:45-4절입니다.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 죽이는 저주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과 저주의 사건이 오히려 빛이 되며 생수가 흘러내리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생수가 터져 흐르는 것을 언제나 심판과 함께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심판을 통하여 생수가 흐릅니다.

 

예수님이 생명수가 되심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자신이 구체적으로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우물가의 한 목마른 여인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자신이 버림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신이 버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지만 그 남편이 자기 남편이 아닌 기구한 여인입니다. 이 목마른 여인에게 이 우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러 동네에 들어갈 만큼 그 여인의 목마름이 해결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의 명절을 초막절로 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 중에서 마지막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대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와서 성전의 번제에 전제처럼 붓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물을 길어다 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마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괄호부분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며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절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무엇으로 이렇게 되는가 하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성령으로 세례란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란 한 성령을 마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탤런트 현석씨와 포항시의회 의장이 복요리를 먹고 둘 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어를 먹고 함께 입원하였습니다. 이처럼 한 성령을 마시게 되면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목마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장악하여 주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가려고 하면 막기도 하시고 그런 것을 제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잠간이며 지나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썩을 양식에 올인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더 귀한 줄 압니다. 이것이 한 성령을 마신 증세입니다.

 

이러한 생명수가 한량없이 흐르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있고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있었던 한 가지가 새 예루살렘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따 먹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셔야 하시는데 뱀의 유혹을 받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땅이 저주를 받고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가운데 같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처럼 살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을 알아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7:18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알고 원하여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이라고 행한 것들이 결국 선이 아니라 악이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저주가 온 것입니다. 이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22:3절을 봅니다.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수가 강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저주와 정죄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드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질 떨어지는 삶을 산다고 그것이 저주와 정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선악과를 폐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이신 그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새 예루살렘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뿌려진 성도입니다. 이들에게는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는 생명에서 끊어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맛보고 증거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 안에서 다시는 저주가 없는 놀라운 은혜를 지금부터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