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4~9 잃어버림과 얻음 2018. 4. 2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지난주간 전 세계가 주목한 뉴스는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면서 남북한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3년 동안 같은 민족끼리 엄청난 살상이 일어났습니다. 3년의 전쟁을 하다가 정전(停戰)이 일어났습니다. 정전은 잠시 전쟁을 잠시 쉰다는 휴전(休戰)이기에 늘 전쟁의 공포분위기로 살아왔습니다. 남북의 정치권은 이것을 서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종전(終戰)과 평화협정(平和協定)을 올해 안에 체결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 뉴스를 전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삼천 명의 기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며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원하는 평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에 대한 개념도 보수와 진보가 다릅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시는 평화는 아무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합동으로 예수를 배척한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십자가로 예수님은 스스로 가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하고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하면서도 압력에 밀려 예수를 죽음에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10:18).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주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며 이방인들이 볼 때에는 로마를 반역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영원 전에 성부와 성자의 언약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영원 전에 그 약속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맡기신 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십자가의 죽음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시는 새 언약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온 세상이 미칠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빌립보서 3:1~3절을 봅니다. 봉독 2주간에 걸쳐서 살펴본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빌립보 교회에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이 안 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자들을 향하여 개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할례를 받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가 참으로 할례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본문 4~5절을 봅니다. “봉독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율법적인 조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말한다면 나는 더욱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합니다. 바울이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모태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이방인 지역에서 태어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이 있지만 그의 부모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나눠질 때에 남 유다에 유일하게 함께한 지파이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나온 지파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하면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태어나면서 금 숟가락 물고 와서 갑 질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엄청나게 열심히 노력한 자라고 합니다. 그 열심히 노력한 내용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습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합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세 오경에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 613가지를 다 외우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로 율법에 열심을 낸 바리새인인지 아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그 당시에 제일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고 합니다(5:34,22:3). 바울은 타고나면서부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사도행전 8:1~3절입니다.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殘滅)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갑니다. 이때 스데반 집사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고합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일제히 귀를 막고 돌로 사울을 쳐 죽였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현장에 사울이 있었고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깁니다. 유대 땅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 있는 자들도 없애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알고 그를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고 다메섹 까지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가던 사울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한 빛 가운데 천둥소리 같은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가던 자들은 못 알아들었는데 사울은 분명하게 알아들었습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는 말씀에 주라고 부르면서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순간부터 3일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끌려 갑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에게 인도되고 안수를 받음으로 눈에 비늘같이 것이 떨어져 나가서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삼 일간 보지 못하다가 본 것도 되지만 고린도 후서 3장의 말씀처럼 모세의 수건이 벗겨진 것으로 봐도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자랑거리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과 베냐민 지파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율법의 유명한 선생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사람이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정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모든 교회를 없애버리려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율법을 왜 주셨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의를 삼았기에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였고 모든 교회를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가 예수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고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알라고 주신 것인데 이들은 율법으로 자기의 의를 세우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이런 길로 갑니다. 율법을 주면 율법으로 자신을 단장합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양심으로 자신을 단장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과 양심적으로 사는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자기들은 율법적으로 양심적으로 의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죄와 타락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런 자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 모든 것이 배설물임을 알게 됩니다. 자기 의가 진짜 의를 배척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 7~9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찾아본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 모태 유대인으로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과 베냐민 지파인 것과 바리새인으로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것과 율법에 대한 열정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흠이 없다고 여긴 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수록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가장 고귀한 지식이며 영생의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이익이며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을 이제는 똥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똥으로 여긴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으로 더러운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즐겨 하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 그런 것은 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모든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전에 유익하다는 것을 다 버립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거름지고 장에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거름을 졌다면 밭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장에는 왜 간 것입니까? 자기가 가야할 밭으로 안 가고 사람들이 장으로 많이 가니 그렇게 장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내가 그 동안 귀하다는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겨서 버려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귀하다고 여기면서 살아왔습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문화 속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습니까? 이 나라는 체면문화가 강합니다. 항상 남을 의식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남에게 손가락질 안 들을 정도로 살아가는 것이면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서양의 개인주의 사상이 너무 빨리 깊이 우리문화에 파고들어서 그나마 유지 되던 체면이나 공동체문화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가치관의 혼동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돈이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천민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교회로 와서 무엇을 얻고자 했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귀하다고 여긴 것들을 얻고자 오셨다면 잘 못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치전도(價値顚倒)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똥으로 여기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썩어질 것과 불에 타면 없어질 것들을 귀하게 여기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한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이 살려고 한 결과가 그리스도를 배척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본문 7~9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중요한 말씀은 자꾸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내게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내가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이 그리스도를 얻고 아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을 손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잃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자기 의가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됨을 알았던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의라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똥 걸레로 만든 더러운 옷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언약의 완성이 성령을 통하여 부어짐으로만 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기에 복음의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 앞에서 자신의 의가 누더기임을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일하셔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에 다른 것을 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그 복음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기쁘고 고상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다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에게 지혜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입니다(고전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