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0~12 예수께 잡힌바 됨 2018. 5. 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유익하다고 여긴 것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한 것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유익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십자가의 원수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적인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제가 질문을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속한 무엇을 얻기 위한 노력을 똑 같이 했을 때에 누가 더 많이 얻겠습니까? 똑 같이 노력하였다면 똑 같이 얻는 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많이 얻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6:7). 성경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상 사람보다 나은 혜택을 준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무엇이 배설물인지 무엇을 얻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 본 7~9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기고 해롭게 여기는 이유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미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만나주시고 인생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얻고 발견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내용인지 맛을 봤기 때문입니다.

 

오늘본문 10을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바울사도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본받기를 원합니까? 문장을 나누어 보면 첫째 그리스도를 알기 원합니다. 둘째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합니다. 셋째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 원합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각주를 보면 교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죽으심을 본 받는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을 본 받는다는 말은 자기도 그와 같이 죽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교회당으로 모이는 것은 그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교회당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을 본 받기 원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하여 모인 곳이라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하여 모인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에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며 이방인들이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죽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 받는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만약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 받는다고 하면 부모는 한사코 말리려고 들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공한다면 모르지만 예수 믿고 죽겠다는데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부모가 이런 말을 하다면 자녀가 말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야만 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으려고 하는 목적이 여기에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해롭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참여되는 것으로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는 것은 인간의 혈과 육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혀야만 되는 일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바울은 계속하여 죽음의 길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사로잡히기 전에는 자신이 가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 몰랐습니다. 죽음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길로 간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달려간 결과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해 버리려는 행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양심적으로 살겠다는 이방인이나 그들이 가장 선한 것이라고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욕구와 욕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은 생존의 욕구입니다. 생존의 욕구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생존의 욕구가 채워지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먹는 것만 해결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배고픔의 시대를 지났으니 보암직한 것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해외여행을 했다고 하면 나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생존의 욕구가 채워지고 나니 새로운 욕망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끄 라캉은 이런 욕망을 타인의 욕망이라고 하고 르네 지라르는  모방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율법조문을 지킴으로 자기를 치장한 것입니다. 자기를 치장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잘 못 지키는 자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기에 자기 양심의 잣대로 자기를 치장하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물론 율법을 준 의도가 이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자체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2:4~9절입니다. 봉독 허물과 죄로 죽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붙들고 있기에 탈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십자가로 나타내시고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 은혜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누구든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에베소서 1:17~23의 바울의 기도를 봐야 합니다. 봉독 바울사도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눈을 밝혀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 강력하게 일하심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강력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일하심에 자기 백성을 함께 참여 시켜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묵시적인 상태입니다.

 

에베소서 4:7~10절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사로잡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였습니다. 그런 모습이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이 세상의 유행과 문화를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자기 의지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더 강한 권세에 붙들려 사는 줄 꿈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욕구와 욕망이 나오는 것은 알겠는데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타인의 욕망, 모방욕망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욕망이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본 대로 이미 하늘에 앉혀진 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며 온전히 이루었다고 함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 주에 연결되는 부르심의 상과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오늘은 사로잡힌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낸다는 말씀을 봅니다.

 

에베소서 4:7~10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를 받았는데 은혜와 은사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은혜(恩惠)와 은사(恩賜)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올라가셨다는 말씀은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오신 그분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실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내리신 그분이 하늘 위에 오르신 분으로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8절의 각주가 있습니다. 시편 68:18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바로 앞의 1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하나님의 명거가 천천이며 만만이시기에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승리하여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 받으신다고 하시는데 바울사도는 대담하게 선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말해도 되는 이유를 봅니다.

 

이어지는 19~21절입니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사로잡혀 있던 우리들을 사로잡아 내셨다면 선물을 받으셔야 하시는데 오히려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구원의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주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인데 그것은 원수들의 정수리를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전쟁의 승리를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가 바울사도를 사로잡아 돌이켜 세우는 것이며 오늘 우리를 사로잡아 돌이켜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우리나 간에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음의 길로 달려가기에 주님의 강하고 전능하신 손이 그와 우리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1980년대에 나온 만화영화에 가제트 형사가 있습니다. 여러 나라가 합작으로 만든 것인데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머리에서 헬리콥터 날개가 나오고 목이 길어지고 줄어지고, 손과 발이 얼마든지 늘어나고 줄어드는 로봇입니다. 그런 손으로 위험에 처한 자들을 구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런 팔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팔은 전능하신 팔입니다.

 

신명기 33:26~27절입니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본성과 본능대로 살아간다면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잡아서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위한다고 생각하고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려고 달려가다가 주님의 영원하시 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자기 백성을 십자가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의 자기 백성들을 다 사로잡아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그리고 신약의 우리들까지 그 십자가가 사로잡아 자기에게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영원 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시는 일을 이루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완성으로 보내지는 그리스도의 영은 구약과 신약의 자기 백성을 사로잡아 내십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성공과 자아실현이라는 길로 달려가다가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혀 삶의 전복(顚覆)이 일어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를 사로잡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위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 사랑과 그 은혜와 그 뜻을 알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님께 사로잡힌바 된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