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3:14~22 사랑 하시기에! 2020. 8. 23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과 징계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향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한다고 합니다. 사랑하시기에 책망하고 징계하는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4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합니다. 아멘이란 진실 되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뜻이기에 성경에서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할 때에 아멘이 나옵니다. 이러한 아멘이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하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에 아멘 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사야 65:16절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진리의 하나님에 각주가 붙어 있을 것입니다. 각주에 보시면 아멘 '고후1:20; 3:14'”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고린도후서 1:20절에 같은 아멘이 쓰였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이 아멘의 하나님이신데 이 아멘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17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이사야 65:17절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구약에서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것이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 옛 하늘과 옛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자기 피로 만들어내시는 분이 창조의 근본입니다.

 

본문 15~17절입니다. “봉독창조의 근본이신 분이 네 행위를 안다고 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마음 속 생각을 모르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네가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고 합니다. 차든지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지역은 근처의 히에라볼리라는 온천에서 온천수를 끌어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약을 만듭니다. 다른 지역에서 찬 물을 끌어오는데 라오디게아에 오면 미지근하여 진다고 합니다. 뜨거운 온천수든 차가운 식수든 라오디게아 지역에 오면 미지근하여 집니다. 이런 환경을 아시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여 토하여 내고 싶다고 합니다.

 

멀미를 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차멀미나 뱃멀미를 하면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고 미지근하여 토하여 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열심을 내자고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언어개념에서 미지근하다는 말은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이 금융업과 목화산업과 약품산업으로 부요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런 곳의 교회도 부요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교회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다 했을 겁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교육관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구제도 선교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만한 그런 부요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감추어진 것을 열어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진 것이란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가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본다는 것은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전복되어야 제대로 보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평소에 원하는 것이 모두 죄가 됨을 알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내가 주의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것으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조차 주님께서 보시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의 일차독자가 히브리인들입니다 율법의 의로 무장한 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의 의가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다시 율법주의자들에게 흔들리니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하여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듯이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도 벌거벗겨 집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하나님의 말씀에 벌거벗겨져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봉독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금도 많았습니다. 목화산업이 발달하여 희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온천수로 만든 약품으로 부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로 연단한 금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흰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입게 되는 의의 옷입니다. 안약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가 값을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미 받은 것의 가치를 알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7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금도 불로 연단하여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금도 결국 닳아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이 연단을 받으면 금보다 더 귀하기에 영원합니다.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말씀은 믿음에 부요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선물이 믿음인데 왜 사라고 하십니까?

 

이사야 55:1~3절입니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포도주와 젖은 양식입니다. 양식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목마른 자들과 돈 없는 자들에게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썩는 양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썩는 양식은 값을 주고 사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섞는 양식은 온갖 힘을 다하여 사 들이는데 썩지 않을 양식은 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의 양식은 돈 없이 값없이 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이 사는 영원한 언약을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살인하고 간음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컸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받은 복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며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4:6~8). 이것이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말입니다.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피로 입혀주신 의의 옷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요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을 가볍게 여긴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입혀주신 의의 옷보다 그들이 만들어 입은 옷을 더 귀하여 여긴 겁니다. 불로 연단한 금, 곧 불의 심판과 같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넘겨주시는 그 믿음보다 세상의 금을 귀하게 여긴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눈이 먼 상태입니다. 영적인 가치보다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더 귀하게 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생명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7:37~39, 22:17).

 

본문 19절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책망과 징계는 사랑하기에 하시는 겁니다. 완전히 버린 자는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버려두심 자체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다른 길로 가면 책망하고 징계하셔서 반드시 돌이키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5~13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생자는 징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반드시 징계합니다. 징계를 받는 중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연단을 받게 되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연단은 우리에게서 영원하지 않은 가치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자기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책망과 징계를 통하여 자기들의 가치로 여긴 것들을 회개하는 겁니다. 이것이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무슨 열심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것에 대한 열심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붙들라고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본문 20~22절입니다. “봉독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전도용으로 많이 사용합니다만 이미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용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란 자기의 것을 갖추어 부요하게 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부요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것들로 부요하게 되니 주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긴 겁니다.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압니다. 이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 회개가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에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말고 네 마음 중심에 자리 잡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함께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9:10~13절입니다.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이 앉으신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이루시려고 오늘도 자기 백성들의 허상을 벗기시고 실상을 알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책망과 징계일지라도 사랑하기에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과 징계를 통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하면 잘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망과 징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게 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