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38~41 누구 편이냐? 2019. 6. 16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지난주 설교제목이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높으냐며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 공간과 같은 시간에 모여서 예배한다고 모였지만 마치고 나서 우리의 속마음을 찍어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같은 모습이 나올까요? 다른 모습이 나올까요? 저의 경험상으로 보면 백인백색(百人百色)입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 나서도 은혜 받았다거나 깨달았다고 하는 내용이 설교자와도 다르고 듣는 사람도 다릅니다. 이럴 때에 자기와 같은 관점의 말을 하면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다르면 다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오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하였다고 합니다.

 

요한의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편 만들기를 하는 자들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로 지역을 나눕니다. 경제적으로도 이미 가진 자들의 세계에 기생충들이 함부로 들어붙지 못하도록 정치가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판사나 검사나 의사들도 숫자가 늘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회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의 편이라고 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서도 나옵니다.

 

39~41절입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쉽게 예수님을 욕할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지지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까? 우리 편이 아니면 좋은 일이라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누가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처럼 주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지만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정도 주는 미미한 자도 상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상이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되는 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상을 받을 것이며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주를 위하여 충성하는 자가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따라갑니다.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우리 편이냐 남의 편이냐고 편 가르기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 파당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 나누기를 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편 가르기를 너무나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천국 비유도 편 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로, 바다의 그물로 고기 잡는 비유에서도 좋은 물고기과 나쁜 물고기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이런 판단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판단만이 의로운 판단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기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자들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판단에 반발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자기 의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자들이 또 자기를 중심으로 편 가르기를 합니다. 같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와 조금만 다른 말을 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과 네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합니다. 같은 형제라고 교제하다가도 조금만 자기 자존심 상하게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마치 예수님이나 된 것인 양, 이미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가 된 사람처럼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란 내가 소유하여 나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하여 해체되는 자들이 진리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편 가르는 모습을 요한만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서도 봅니다.

 

민수기 11:26~30절입니다.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6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1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할 때의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만 먹고 사니 질린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섞여 사는 족속들이 더 불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달라고 원망할 때에 모세도 불평을 합니다. 내가 이들을 낳은 것도 아닌데 힘이 드니 나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지도자 70명을 모아서 여호와의 회막에 오라고 하십니다. 70명을 불렀는데 두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모인 자들이 예언하게 됩니다. 그런데 회막 앞에 오지 않고 있던 두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소년이 모세에게 보고하니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런 예언을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한 말이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놓은 사람입니다. 민수기에서 편 가르기를 하다가 책망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진영을 향하여 마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적들을 위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너의 편도 적의 편도 아닌 여호와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는 말씀 앞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느냐고 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편 가르기를 하다가 땅에 엎드리고 신발을 벗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치 여호수아나 요한처럼 예수님이 자기편이라고 자기를 중심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책이 한권 왔습니다. 책 제목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 지상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재림 예수를 믿으라!’입니다. 책을 보면 첫 페이지에 태극기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서 사진을 넣고 다음 페이지에 재림 예수라고 이미 죽은 사람의 사진을 넣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 전봇대에서 재림 예수라는 사진을 본 그 사진입니다. 재림 예수교 천국복음전도회 (초막절)에서 보낸 것입니다. 부제에 다니엘 말씀과 계시록 예언의 말씀은 신천지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재림 예수교회에서 이루지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둘 다 이단인데 서로 자기가 옳은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단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웃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복주의나 번영신학이나 세대주의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을 전하는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에 이렇게 모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모인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다 같습니까? 큰 방향성에서는 같다고 보는데 각론에 들어가 보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경우에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너는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판단하고,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고 편 가르기를 해야 합니까? 물론 성경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6절과 10절을 보면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사람의 행위나 공로를 덧붙여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어 그 은혜로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인하여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공로를 덧 붙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들은 단호하게 배척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는데도 나와 똑 같은 표현을 하지 않고, 우리의 활동에 함께 하지 않는다고 적으로 돌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14:1~4절입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자유 한다고 하면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도 거리낌 없이 먹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서로 편 가르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런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고 합니다.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저주와 이 말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지만 같은 복음을 듣고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을 때에 서로 비판하여 편 가르기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5~12절을 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는 형제의 눈에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를 그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발각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시간이 없습니다. 자기를 보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에도 바쁜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성도는 지금 그 심판대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죄를 자복하고 직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만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라고 하여도 긍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이 연약하다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먹고 마시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평강을 맛보며 기뻐하는 곳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8:17,18). 이 은혜 안에 거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