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38~44 서기관과 과부 2019. 11. 3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2)렙돈 곧 한 3)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시편 110:1절의 말씀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공식적인 선생들이기에 굉장히 권위가 있고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특히 고대로 갈수록 글을 배우는 것은 특별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삼하8:17).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을 받은 유대교 학자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이 서기관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율법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제사장가문에도 이런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읽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 한문을 아는 것은 아무나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사대부집안의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는 글을 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율법자체가 종교와 생활의 법으로 시행되는 유대사회에서 서기관은 상당한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본문 38~4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합니다. 이들이 하는 행위가 어떠합니까?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긴 옷이란 제사장들이 겉옷으로 입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이라는 표를 내기 위하여 멋있는 겉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시장에서도 인사를 받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습니다. 겉으로는 이런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합니다. 이런 자가 더 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생각나는 날이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올린 날로부터 502년이 되었습니다. 개혁의 원리는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가르침이라도 성경과 다르면 다 고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삼대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말하면서 사제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라고 만민 제사장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은 아직도 사제라고 합니다. 제사가 없어진지 언제인데 아직도 제사장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것을 개혁한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목사들이 가운을 입고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믿고 따라갑니까? 신천지 강사와의 만남을 복음칼럼에 올렸습니다. 이만희 총회장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만 진리라고 하니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저만이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자기 손에 맡겼다고 하면서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생명책에 뺀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자들은 주의 종이라서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2:9). 기름부음은 성령이 임한 모든 성도들입니다(요일2:27). 영들을 분별해야 합니다(요일4:1~6). 그러므로 주의 종이란 말에 속지 마시고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목사 설교 그만 듣고 예수님의 설교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여러 교회의 이런 저런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어려움 가운데 대부분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성직주의(聖職主義)입니다. 목사가 교인들과 신분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신분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 주신 것은 기능상의 차이입니다(4:11,12). 저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를 사도들로 봅니다. 목사와 교사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복음을 만들어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성경의 사도나 된 것처럼 성경에도 없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특별한 신분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주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직주의에 빠졌다고 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만이 성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가 왕 같은 제사장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주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주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주의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이 말씀을 모르니 자꾸 목사나 이단 교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이 모양이 된 것은 목사의 책임이 크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습니다.

 

저는 서기관의 모습이 신부나 목사와 같다고 봅니다. 가운을 입으면 무언가 거룩해 보입니까? 구약의 제사가 있을 때는 제사장들이 구별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이후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특별할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목사가 목사안수 받을 때에 가운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저는 가운이 없습니다. 정기 노회로 모이면 예배 후에 회원들이 성찬식을 합니다. 작년에 저도 처음으로 성찬식을 인도하면서 가운 없이 했습니다. 아마 노회 역사에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와 교인들이 가운을 입지 않고 예식을 하면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0189월 가톨릭 신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 주교들에게 모든 형태의 권한 남용을 거부하고 사제 성추행과 이에 대한 은폐를 부추기는 성직주의 문화에 대항해 함께 싸울 것을 당부했다.” 새 주교들에게 교황이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형태의 권한남용을 거부하고 성직주의 문화에 대하여 함께 싸울 것을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교황이 성직주의와 싸우라고 하였지만 여전히 가톨릭은 성직주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가 정말로 성직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의 권위의식이 잘못된 성직주의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서기관과 같은 자들이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 인사를 받고 회당과 잔치자리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여 거룩함을 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이렇게 거룩한 사람처럼 보여 놓고서는 속으로 과부의 가산을 집어 삼키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율법사회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이 율법 전문가들이니 이들에게 가난한 과부들이 자신들의 가산을 맡기면 법아는 자들이기에 가로채는 것입니다. 판검사들이 법을 알기에 법으로 범죄를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전능하사 그들의 속을 다 보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자가 이렇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종교적인 사기꾼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41~44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십니다. 무리가 헌금하는 것을 보십니다. 헌금함이란 성전고(27:6)라고도 하는데 여러 개가 있다고 합니다. 여인이 헌금을 하는 것을 보면 여인의 뜰에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은 것입니다. 이 금액은 가난한 사람들의 하루 최저 생활비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의 헌금이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는데 다음날 기적처럼 3060100배가 생겼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었다. 그러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간증이 되겠습니까? 생활비 전부를 하였더니 평생 먹고 살 것이 다음날 생겼다고 하면 간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정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면 그 다음날도 주님께서 공중의 새처럼 들의 풀처럼 입히고 먹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앞에서 본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과부들이 부탁하고 맡긴 재산을 가로챌 수도 있지만 이 서기관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억지로 하도록 가르쳤기에 이 과부가 그 구차한 생활 중이지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이 아니냐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교회의 장로들 수십 명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교회의 투명한 재정집행을 요구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가난한 중에 열심히 일해서 헌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헌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가난한 사람들이 힘들게 벌어서 왜 교회에 헌금을 했을까요? 그렇게 헌금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비록 서기관들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하여도 그 가르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은혜를 아는 사람일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하여 헌금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헌금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비록 과부로 가난하게 살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산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처럼, 들의 풀처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 것을 알기에 내일을 주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헌금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의 헌금은 계산이나 거래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풍족한 가운데 한 것보다 이 과부가 더 많이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란함에 흔들리지 마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주 예수님을 믿고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