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34~40 가장 큰 계명 2017. 3. 19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모든 가전제품이나 기계에는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제품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설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용하다가 방법을 잘 모르면 사용설명서를 찾아보는 것도 귀찮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저도 휴대폰이 고장이 나서 서비스 센터에 갔더니 전원만 껐다가 켜면 리셋이 되는 문제였습니다. 어른들은 스마트 폰의 기능을 백분의 일도 모를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몰라도 좀 불편할 뿐이지 괜찮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입니다. 그러면 창조주가 설명서를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 그 설명서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우리 인간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사용되어야 최적의 상태가 되는지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계의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최적의 상태로 사용되어지는 설명서인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용설명서를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여 적용하고 있기에 인간의 삶이 피폐하고 불행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수요일 질문 다시 합니다. 지난 한 주간 행복하고 기뻐하고 감사한 한 주였습니까? 아니면 불행하고 슬프고 불만이 가득한 한 주였습니까? 대부분 후자에 치우쳤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명기 10:12~13절입니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길은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너희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행복은커녕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포로 된지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기반성이 일어납니다. 자신들의 나라가 망하고 연약하게 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에 그런 내용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자고 한 운동이 바리새파 운동입니다. 기존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있습니다만 특히 바리새파의 율법선생들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하라는 248계명과 하지 말라는 365계명을 찾아서 모두 613가지의 계명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마태복음 22:34~40절을 봅니다. “봉독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오경으로 부활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하심으로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율법의 선생이라면 율법을 거의 다 외우는 자들이며 이들은 그들이 정한 613가지도 다 지킨다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예수님께 시험하려고 질문한 것입니다.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면 얼마든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9:18절의 말씀으로 답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둘째도 그와 같다고 하십니다. 율법에서 첫째와 둘째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유대인들은 모든 우선순위가 하나님이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답변을 하시면서도 둘째도 그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이라고 하십니다. 강령이란 핵심 줄기라는 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 전체를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때로는 구약을 율법이라고도 하고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으뜸 되는 가장 큰 줄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내 이웃이라도 내 몸처럼 사랑하면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병행구절도 함께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2:28~34절입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마태복음보다 상세하게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바리새인 율법사로 말하는데 여기서는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서기관은 바리새파 중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경건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성경을 필사하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을 하고 붓을 씻고 필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사가 끝나면 전체를 다시 확인하는데 몇 글자 이하로 틀린 글자가 나오면 고쳐서 필사본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글자 이상 틀리면 성경 전체 필사한 것을 다 파기한다고 합니다. 이들의 성경에 대한 경외감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서기관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서기관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답변이 옳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는 말씀과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번제나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 서기관의 답변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전체로 드리는 번제와 기타의 제물보다 더 나은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답변을 들은 예수님은 이 서기관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감히 다른 사람들은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서 수많은 번제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전체로 드리는 번제만이 아니라 온갖 제물과 헌물들이 있지만 그것보다 나은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번제와 각종 제물들도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십계명을 더욱 확대하여 613가지가 되는 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의 뜻을 모르고 부지런히 제물을 바쳤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자기 사랑만 가득하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사야 1:11~17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지금까지의 말씀을 보고 나서 이사야 1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제물을 성전에 갖다 바쳤습니까! 얼마나 절기를 잘 지켰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서 질린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런 제의(祭儀)로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실을 버리라고 합니다.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의 답변이 선지자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7:8~11절입니다.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제사하려고 오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전합니다. 이 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성전에 나와서 무수한 제물을 바치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고 제물을 바쳤기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씀입니다. 평소의 삶은 도둑질 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합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는 다시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제사를 부지런히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렇게 되었기에 예루살렘이 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교회라는 곳도 이런 모양이라면 이미 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28절입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여기서는 율법교사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느냐고 역질문을 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바른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면 네가 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핵심 강령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약 성경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할 능력이 사람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통하여서도 보았습니다만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헛된 짓만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29~37절입니다.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2)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 선생이라면 하나님 사랑은 기본으로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율법에 나타나는 이웃 사랑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서 이미 말씀드렸기에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간략하게 보려고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강도 만난 자를 제사장이 피하여 갔습니다. 레위인도 피하여 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핑계되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개같이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웃이 된 것입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자비를 베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비를 베푼 이웃이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가 다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강도가 우리를 다 사로잡아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다 죽어가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참된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예수님만이 참 사람이며 참 이웃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요한복음 5:39~40절입니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구약 성경 곧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강령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 줄 알고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 선생이라는 자가 영생의 문턱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말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 구약시대에는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은 이미 새 언약을 내다보았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율법의 조목을 지키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율법선생들도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린다고 한 말씀은 율법의 조문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고후3:6).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게서 모든 언약을 완성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율법의 공의를 이루어 내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 의의 선물을 넘겨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자리입니다.

 

갈라디아서 3:15~22절입니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4)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4)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4)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4)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은 상호언약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일방적인 은혜언약입니다. 은혜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아브라함 언약이 먼저 인 것은 어떤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율법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입니다. 성경 곧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과 선지자가 전한 핵심 강령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약속을 다 이루신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로부터 의의 선물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23~27절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5)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4)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서로 원수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는 한 몸이 되었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셨으며 그 이루신 의를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시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돌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율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얻은 자유로 서로 종노릇 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곧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만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 사랑을 미리 맛보는 자리가 교회로 모인 곳입니다. 이런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