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5~26 표리부동(表裏不同) 2017. 4. 16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오늘은 전 세계의 교회들이 부활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년 때에 교회를 다니면서 부활절을 지킨다고 하는데 왜 꼭 한 주전에 부활절감사헌금 봉투를 주보에 넣어주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탄절에도 그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때로는 감사헌금의 예산금액도 주보에 밝힙니다. 물론 부활과 성탄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맥추나 추수에 감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으니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사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우리도 절기마다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사한 것이 정말로 성탄과 부활과 추수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한 것입니까? 아니면 더 많은 복을 준다는 말 때문에 했습니까? 복을 준다는 그 복이란 것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아니라 대부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런 설교를 듣고 절기마다 감사헌금을 한 우리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라고 저주하시는 일곱 번의 말씀 중에 다섯 번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다고 책망합니다. 눈 먼 바리새인들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정결규례를 철저하게 지키려고 음식을 먹기 전에 손도 씻고, 그릇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표시를 내는 자들이지만 그 속에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거룩함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 부으시면서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겉도 깨끗할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와서는 시비를 겁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느냐고 합니다. 율법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구체적인 법조문이 없습니다.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부정하여 진다는 규례를 확대 적용하여 장로들의 전통으로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왜 그러느냐고 따집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합니다.

 

율법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한 장로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피하여 나가는지를 봅니다. 부모님께 마땅히 드려서 공경해야 하지만 부모공경이 부담스러우니 말로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더 이상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 봅니까? 아니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으로 봅니까? 우리가 다 겉과 속이 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속이 다 들켜진다면 같이 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부라도 그 속마음을 다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사이가 서로 좋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온갖 생각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필요로 하지만 청소년기가 되었는데 부모가 계속 잔소리 하면 차라리 부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마태복음 12:15~16절입니다.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이 질문도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한 질문이지만 적어도 이들이 보는 예수님은 겉과 속이 같은 분임을 인정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선포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을 하실 뿐만 아니라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23:3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지도자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인 최고의 권위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종교계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헤롯을 향하여 여우라고 하셨습니다(13:32). 종교권력과 세속 권력을 두려워한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속과 겉이 같으신 분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이런 분이 겉과 속이 다른 자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겉모습을 치장하려고 모였다면 여기에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속이 어떠한지 말씀을 통하여 점검받고 우리의 속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알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자들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여기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겉모습과 달리 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율법을 따라 할례를 행한다고 하여도 마음의 할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옷은 찢을 수 있어도 마음을 찢을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19:12~16절입니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불순종하였기에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미 율법에서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필요한 이유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그리고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겉과 속이 다른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새 언약으로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은 몸의 할례는 하여도 마음의 할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합니다. 새 언약은 애굽에서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애굽에서 아내를 이끌어 왔지만 그들의 마음이 남편에게로 따라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새 언약이 완성이 되면 여호와를 알게 되며 동시에 그 악행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때가 이르렀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정결규례를 행하고 있는 그들에게 율법의 한계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의로워지기 위하여 장로들의 전통까지 지키고 있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이 겉과 속이 다른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겉과 속이 같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힘과 세상의 힘을 가지고 대중들을 선동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십자가의 사건이 오히려 새 언약을 완성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렴풋하게 깨달아도 그 내용이 너무 두려운 내용이라서 감히 묻기도 어려워하였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이 새 언약을 성취하는 일임을 알고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22:14~20절입니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자들을 유월절 명절에서는 죽이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에 잡히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떡과 잔을 주시면서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십자가가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19:30). 이렇게 십자가로 이루실 것을 요한복음에서 내가 들리면 이루겠다고 하신 세 가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며(3:14,15), 둘째는 참된 지식을 알게 하시고(8:28), 셋째는 자신에게로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12:32). 이것이 십자가로 이루시는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넘겨주시면 그 성령이 임한 자는 비로소 자신이 표리부동한 자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 겉을 치장하던 유대인들도, 양심적인 행위로 자신을 가리던 이방인들도 주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속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만 바라보고 믿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십자가로 이루신 새 언약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알게 되기에 겉과 속이 한결같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임을 압니다. 이런 자들은 날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듣는 복음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주님 오실 때 까지 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성찬을 행합니다. 처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십 년을 성찬에 참여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성찬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가 왜 새 언약의 내용이 되는지 깊이 마음에 새겨지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성찬만이 아니라 성도가 모이는 모든 모임에는 항상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누어져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하는 의식적인 성찬이 아니라 날마다 주의 살과 피가 나누어져야 하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증거 되어야 할 내용이 주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새 언약입니다.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만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