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9~36 조상의 양을 채우라 2017. 4.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오늘 본문은 화 있을진저!’의 일곱 번째 말씀입니다. 그동안 보았던 여섯 가지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저주를 들은 자들은 평소에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랍비와 선생이라고 칭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육신의 아버지보다 율법선생이 더 존경을 받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는 현재의 삶을 가르쳐주는 아버지이지만 율법의 선생은 영원한 나라의 법을 가르쳐 주기에 아버지보다 더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간략히 요약해 봅니다.

 

첫째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기에 저주를 하십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누가 봐도 경건한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존경을 받는 이유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가르친다고 해서 존경을 받았는데 실상은 그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교인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단이라고 알려진 단체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감히 발바닥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해서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을 만든다면 그들의 전도자체가 얼마나 저주 받을 일인가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히 전도하라고 하지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한다면 오히려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셋째는 유대인들의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께 가까운 것으로 맹세를 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맹세를 하면서 종교적인 이해관계를 따라 맹세를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구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맹세를 하는 그 속을 보시고서 저주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미 5장에서 맹세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주제를 알지 못하면서 맹세를 시키고 그 맹세를 꼭 지키라고 하는 속셈을 예수님은 아시기에 그들에게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넷째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십일조를 한다는 그들에게 저주를 하십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라는 그 말씀에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담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겉으로는 십일조를 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행하도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하기까지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그 영원한 용서와 사랑을 나누는 이웃 사랑의 연보(捐補)입니다.

 

다섯째는 표리부동하였기에 저주를 받습니다. 여섯째는 회칠한 무덤이었기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은 깨끗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규례들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자신들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저주가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습니까? 어떤 분은 예수님의 이러한 저주의 말씀이 자신은 상관이 없는 줄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니 이러한 저주가 모두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 해당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전하는 자를 돌로 치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악한 자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29~33절을 봅니다. “봉독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주를 받는 이유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은 그런 조상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일곱 번째 저주의 말씀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뱀이라고 하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이 생각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뱀의 일이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뱀의 후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격분시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3:7절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떻게 뱀의 자손들이 되겠느냐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가 너희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고 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것이 이미 종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율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면서 온갖 정결규례를 지키는 그들이 지금 저주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책망입니다. 예수님은 타작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손들이라고 거침없이 선포하는데 그들은 왜 가만히 있습니까?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 봉사하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여러 명이기에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사람을 제비뽑아 선택을 하는데 사가랴가 뽑혀서 분향을 하는 중에 주의 사자가 임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믿지 못함으로 아이를 낳을 때 까지 말을 못하고 있다가 아이를 낳았을 때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자 입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요한이 이렇게 외쳐도 제사장의 아들이며 선지자로 알기에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죄를 책망하자 헤롯이 잡아가두고 결국 그의 목이 잘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처럼 제사장 출신도 아닙니다. 대단한 율법학자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지만 자나나시기를 갈릴리 나사렛 지역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러한 것도 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말한 것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할 정도로 예루살렘의 변방이며 이방인과 섞여 사는 지역이 나사렛입니다. 이곳 출신의 예수라는 자가 예루살렘까지 와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한다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향하여 유대 지도층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를 의논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를 죽이는 것이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합니다.

 

본문 32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면서 자신들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가 너희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량을 채우는 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도 죽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봉독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를 보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보냈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들을 때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어떻게 감히 나사렛 예수인 네가 선지자를 보낸 하나님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보냈는데 너희가 그 중에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면서 박해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로마인들이 이방인을 처형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심으로 이미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봉독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외식을 고발하면 그들도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선지자를 죽인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조상들부터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사람이 아벨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받아주시는 아벨을 가인이 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죽이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은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이 땅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합니다.

 

역대하 24:20~22절입니다. “20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요시야가 8세에 왕이 됩니다. 그렇게 된 것은 여호야다 제사장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돌보아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은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의 역할을 하였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방백들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요시야 왕은 그동안 여호야다가 시키는 대로 한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 여호와의 진노가 임합니다. 선지자를 보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에게 주의 영이 임하여 그들의 죄를 책망합니다. 그러자 무리들과 왕이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가랴가 죽은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의 성경분류에 의하면 역대기가 제일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선지자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런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선지자 죽인 후손임을 증명한다고 하시면서 너희도 너희의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조상들의 양을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3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이르신다고 합니다.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된다는 일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그 조상들의 양을 다 채우게 되는 일이 이 세대에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 조상들의 양을 다 채우는 일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자들이 손에 의하여 살해당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저주 아래 있는지 십자가는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도 2천 년 전에 그곳에 있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를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서는 동일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농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때가 되어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때리고 죽인 것입니다. 더 많은 종들을 보내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니 아들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으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 세상이 왜 하나님의 진노가 아래 있는지를 보여준 일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이 세상이 왜 저주를 받았으며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 내신 주의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자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이 세상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날마다 별세를 꿈꾸며 사는 자들이 십자가의 영 곧 종말의 영이 임한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조상들의 양을 다 채운 십자가는 구약의 죄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십자가입니다.

 

사도행전 7:51~53절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 조상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자들을 박해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의인을 잡아 죽인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그들을 책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상의 양을 채운다는 그 내용을 스데반 집사가 전합니다. 그러자 마음에 찔리기는 하였지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14~16절입니다.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하나님의 교회를 본받은 자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이방인 지역의 교회도 그 동족들에게 동일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핍박을 하는 일에 유대인들이 더 앞장을 섭니다. 주 예수를 죽이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복음 전하는 자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자기 죄를 항상 채우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십자가의 복음은 이런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너희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의인이신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합동으로 예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이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회개하여야 할 내용입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을 싫어하여 오늘날 복음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인간 중심으로 해석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십자가는 거저 구원하여 주는 자격증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빨리 그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상실과 죽임인줄 모르고 획득과 성공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태어났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죽은 상태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죽음을 연장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활동을 죽이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죽은 자로서는 불가능 합니다. 오직 산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심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을 스스로 살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려주십니다. 그 살려주심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일 년에 몇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모일 때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사람에게는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저주의 모습이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십자가로 일어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연장하기 위하여 사는 우리에게 그 죽음을 죽이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이 싫다고 밀쳐버린 것입니다. 그 밀쳐버림으로 나타는 것이 종교적인 업적 쌓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데 이런 나를 신이 설마 외면하랴이런 마음이 예수님을 살해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죄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하였기에 예수님을 살해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을 살해한 자로 발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가 나온다면 그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사도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유쾌하게 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