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57~66 무덤에 머물러 2017. 12. 3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시면서 영혼이 떠나가신 장면을 보았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이 보면 로마를 반역하다가 처형당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의 순간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신명기 21:23절에 의하면 나무에 달아 죽인 자를 밤새 달아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라고 합니다. 밤새 시신이 나무에 달려있는 것은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기에 그런 시신이 밤새 달려 있다는 것은 땅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이러한 율법을 너무나 잘 아는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들의 다리를 꺾어서라도 빨리 죽여 장사지내도록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두 강도는 살아있기에 다리를 꺾고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다리를 꺾지 않고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이러한 내용도 뼈가 꺾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본문 57~60절을 봅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내어 주라고 명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15:43).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의 제자라고 합니다. 어디나 소수의견보다 다수의 의견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그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허락받습니다. 그리고 세마포로 사서 자신이 마련해 놓은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한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다면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예수를 처형하여 버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신을 달라고 하여 자신의 무덤에 장사지낸다는 것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 사람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이사야 53:9절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악인과 함께 죽는 죽음이었지만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가족 공동무덤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부자라고 마태가 밝히는 것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61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의 목격자들이 여자들입니다. 여자는 증인의 자격도 없는 시대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의 목격자들이 계속하여 여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여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유대의 경계를 잘 넘어서지 못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대의 경계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고 남녀노소 신분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됩니다.

 

본문 62절입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것도 유월절과 무교절이 연결되는 큰 안식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밤에 달려있으면 안되고, 더구나 안식일에 시신이 달려있으면 안된다고 빨리 죽여 달라고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총독에게 나가서 군인을 보내어 무덤을 봉하고 지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일한다고 비방한 자들이 안식일에 이렇게 일한 것입니다.

 

63~66절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어기면서 빌라도와 의논한 일은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가두어 봉하여 두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주라고 부릅니다. 진짜 주님을 죽여서 무덤에 묻어두고서는 빌라도를 주라고 부르면서 진짜 주님을 속이던 자라고 합니다. 저 속이던 자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였기에 만약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가서 백성에게 말하기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면 후의 속임이 더 클까 두렵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안식일 예비 일에 묻히시고 안식일을 지나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지만 날짜로는 삼일이지만 시간상으로는 만 삼일이 되지 않습니다만 그동안 예수님은 무덤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무덤에 묻히신 것은 그냥 부활의 때 까지 기다린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버지께 버림받은 모습이지만 이 죽으심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죽음으로 무엇을 이루십니까?

 

히브리서 2:9~10절입니다.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영원부터 존귀하신 분이 왜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맛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맛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맛본 것이란 죽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완전한 죽음아래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입니다. 즉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이루시는 일을 그의 죽음으로 이루어 내십니다. 죽음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내어 주시고 얻으실 권세가 있으신 분입니다(10:18).

 

이어지는 14~18절을 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신 이유는 우리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며 일평생 벌벌 떨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시는 일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셔야 합니다. 그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삼일동안 무덤에 머물러 계심은 죽음 아래 있는 우리와 완전히 연합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죽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3:31~32절입니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고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지만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땅에 속한 자들은 땅에 속한 것만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25~29절입니다.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는다면 살아납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살아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어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멀쩡하게 살아있고 그것도 잘 살아보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이미 죽은 자라고 선포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아있다고 평생을 발버둥치지만 생명과 상관없이 본능적인 생존을 위하여만 살아가는 모습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살아나는 길은 오직 주의 말씀이 들려야 살아납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들리면 살아납니다.

 

25절을 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고 합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살아납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었기에 그 아들을 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아들의 인자됨으로 인하여 심판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인자됨으로 인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옵니다.

 

28~29절을 봅니다. 그 때는 무덤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이때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죽음에서 부활할 때를 말합니다. 마지막 부활의 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성경에서 선한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악한 일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1~15절입니다.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무덤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일어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책들은 복수이고 생명책은 단수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한 사람들은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복된 소식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에 대한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갑니까?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까?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이 모두가 이 땅에서 살려고만 합니다. 사는데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살려고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남을 해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려고 하는 것이 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살려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10~11절입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지 않기에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신 것은 죽은 우리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도 죽음에 넘기심으로 생명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