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15 부활 후 갈릴리로 2017. 12. 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1)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부활은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였다는 종교학 박사나 신학박사들도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제자들이 너무 그리워하여 그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예수님의 정신의 재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로 받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온전한 몸의 부활이지 정신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장사지내는 것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병행본문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러므로 돌문을 어떻게 열지를 염려하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있습니다. 그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경비병들이 그 천사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본문 11~15절을 먼저 봅니다. “봉독 지난주에 마태복음 27:62~66절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었기에 경비병을 보내어 무덤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성전경비병들이 무덤의 돌을 인봉하고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시에 지진과 천사가 나타나서 무덤의 문이 열리자 경비병들이 혼비백산하여 이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립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의논하여 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서는 자기들이 잘 때에 그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하라고 합니다. 경비병이 이렇게 한 것이 총독에게 들리면 경비병들이 문초를 당하여야 합니다. 이 걱정을 하였기에 우리가 총독에게 잘 말할 것이니 염려 말라고 하면서 돈을 많이 주었기에 그들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오늘날이란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욱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뿐이지 부인하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무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경비들의 문책도 막아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권력집단이 부활의 소식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 부활의 소식은 지금까지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이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말한 대로 시체를 훔쳐갔다는 식으로 거짓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을 믿는 자들은 참으로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본문 4절과 8절을 봅니다. 경비병들은 부활의 사건을 목격하고서는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무서움도 있었지만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서 한 인사도 평안이었습니다(20:26).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도 평안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는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예수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면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 부활하는 것은 믿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몸으로 부활하실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예수님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만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38~40절입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여기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직접 하시지는 않았지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만에 나온 것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요나처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16:21~25절입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은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 고백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말리고 나섰습니다. 요나의 표적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지금 두 번째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고 있기에 말리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이는 우리의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이것을 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는 길임에도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사는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

 

17:22~23절입니다. “17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 하더라예수님의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이 매우 근심을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믿지 못하니 매우 근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근심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죽음조차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근심을 내려놓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20:17~19절입니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에서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네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근심만 하였지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 후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기를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면 자기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기 위하여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지려고 갑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군림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지 않다고 하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 섬김이란 자기 목숨을 바쳐서 많은 사람을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7절과 10절을 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너희가 뵈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려고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도 여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나를 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인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형제라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6:31~32절입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이곳 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다섯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여자들이 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아도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이루어내십니다. 그런데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도 가신다는 말씀을 여기서도 하셨습니다. 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4:18~22절입니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능력을 봅니다.

 

이어지는 23~25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교회에서 표어로 삼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교회가 되자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치료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러 갑니다. 그러니 귀신도 쫓겨나고 병자도 고칩니다. 대단한 능력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맞이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대로 서로 시기경쟁하면서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왜 올라가십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히고 고난 받고 죽기 위하여 올라갑니다. 이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꿈이 십자가 앞에서 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처음에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그 처음 자리인 갈릴리로 내려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를 삼고 가르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곧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소가 감람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 후에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까? 앞에서 본 대로 처음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는 높아지려고 따라갔습니다. 잘 살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죽기 위하여 간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전후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에는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랐으니 죽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로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0:37~39절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볼 때에 죽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 처음 교회로 나왔을 때에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살려고 왔습니다. 그것도 남들보다 더 잘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잘 안 되니 남들만큼이라도 잘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원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비방과 조롱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교회고 하나님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하면서 옛날로 돌아가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이런 생각자체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내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면 더 많은 것으로 보상받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가족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더 잘 살기 위하여, 더 높아지기 위하여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다 무너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처음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처럼 이것저것 버리고 세상친구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에서 잘 될 줄 알고 따라는 길에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하늘에서도 큰 상을 얻는 줄 생각하고 열심히 달려가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처음 갈릴리로 올라가는 제자들의 자세보다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꿈이 무너진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서 고기나 잡으려고 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실 것을 말씀하신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도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기는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갑니다. 이러한 시간이 약 40일 지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곳이 감람산입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이 임하도록 기다리라고 합니다.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협박을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느냐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또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우리 개인의 경건함이나 기도의 능력으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 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러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 다시 갈릴리로 가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골인지점을 십자가로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처럼 따라가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그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다시 십자가로 가게 됩니다. 이제는 살기 위하여 가는 길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가는 길이 됩니다. 전에는 내가 띠를 띠고 갔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이 띠를 띠우고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