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22~25 둘 사이에서 2018. 2. 11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3)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지난주에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주간을 살아보니 어떠하였습니까? 여전히 나는 나를 위하여 살아왔음을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을 안 들었다면 모르겠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살아도 나를 위하여 살고, 죽고 싶어 하는 것도 나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하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사도와 같은 사람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을 봅니다.

 

로마서 8:9~11절입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체로 우리 안에 오실 수가 없기에 영으로 오십니다. 영으로 오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 그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을 그리스도라고도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영이 임한 자는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 임하게 될지를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증언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에게도 임하여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사도들에게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이 다 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우리가 잘 모르기에 여러 면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 예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여러 영이 아니라 한 영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3절을 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은 건물로 된 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너희는 내가 가는 길을 알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어떻게 그 길을 우리가 알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못 알아듣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16~20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십자가에서 이루어내십니다. 요한복음 19: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고개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 가셨다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로 보면 그 영혼을 넘겨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하여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세상은 알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몸으로 오시지 못하시기에 영을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그 일을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보낸다고 사도행전 2:23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삼위일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인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하게 되고 그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 합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며 예수님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 속하게 되면 세상이 미워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미워할까요? 성령이 임하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본 20~21절을 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자기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보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임한 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22~23절을 봅니다. 내가 죽는 것이 나에게 더 좋지만 육신으로 사는 이 것이 내 일의 열매라면 내가 무엇을 택하여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미 하늘의 그 영광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의 나라에 지금이라도 가는 것이 더 유익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직 살려두셨다고 하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자신은 죽음과 삶의 두 경계사이에 끼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와 더욱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좋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3~17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초대교회 때에 임박한 종말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기에 그들은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보내시고서는 재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 믿는 자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이 어떻게 되는지 염려하면서 죽은 자로 인하여 심히 슬퍼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우리도 홀연히 변화하여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휴거라고 하면서 온갖 천년 왕국설과 환난을 가지고 휴거를 이야기합니다만 이 사건은 주님의 재림이 일어날 때에는 이미 시간이 끝나는 묵시적인 개념이기에 우리의 시각으로 시간적 순서로 보이지만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완전한 상태는 영원토록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미 주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유혹에서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이미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기에 삶보다 죽음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몸의 부활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약속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 세계가 너무 좋아서 이 세상의 언어로는 유비가 안 되기에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고후 12:4). 그래서 죽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군에서 전역하는 것이 사병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듯이 성도는 별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합니다. 떠나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끼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떠나는 것 곧 죽는 것이 훨씬 자기에게는 유익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삶과 죽음이라는 둘 사이에서 끼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임한 성도는 죽음을 더 선호하게 되지만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이미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기에 기꺼이 죽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 이 둘 사이에 있기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자기에게 유익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합니다. 그 유익을 끼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5~26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풀려날 소망을 가졌다고도 봅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지금 살아있는 것도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자세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서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인하여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26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가게 되면 여러분은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랑이 많아진다고 하는 번역으로 인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많이 함으로 나의 자랑거리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하는 일에 바울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0~31절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 하라고 하니 예수 믿는 내가 무엇을 잘 해서 자랑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30절을 보시면 도대체 인간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땅의 티끌이며 먼지입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다면 보배를 자랑하는 것이지 질그릇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바울이 도움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사람의 자랑거리는 다 날아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설교를 듣고서 적용을 해야 한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체적으로 적용을 잘 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적용을 하면 그것은 새로운 법을 주는 것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그냥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만 적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늘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 죽음이 더 좋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손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선택의 순간에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되느냐고 하는 분들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우리로 하여금 나의 유익이 아니라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선택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앞자리를 비워주자고 하면서 제가 대접할 것이 이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다른 지역의 어떤 분이 지난 주 중고등부 수련회 광고를 듣고서 학생을 대접하라고 봉투를 주셨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유익보다 손해를 택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터키에 있는 분입니다. 설교시간에 두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42세의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딸과 함께 남아서 살아야 하는데 터키에서 추방된 선교사님을 위하여 선교헌금을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상당한 금액을 보냈으니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여자 혼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딸을 키우면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연락이 와서 자신들이 준비한 연보가 있다고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좌번호를 보냈더니 선교사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면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 행위를 강조한다는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이름과 영광이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기 전 재산을 다 기부하고, 자기 몸조차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 재산을 기부하고 몸조차 내어주면 자기의 유익을 구한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자기 이름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이것도 자기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바울사도가 말한 것은 성도의 삶이 어떠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고, 죽어서도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연합되어 지기에 죽는 것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부활의 영광의 날에는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볼 것이며 영원히 그리스도와 거하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찬송가 2341절 가사만 옮겨놓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세상 오실 때 기쁨으로 우리 맞아 길이 같이 살겠네 영화롭고 아름다운 우리 본향 천국에서 주와 같이 영원히 살겠네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산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둘 사이에 끼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자명해 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가 그 말씀대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