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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이름을 예수라 하라 2014. 6. 29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오늘이 6월 29일이군요! 성경구절 하나 외워두세요!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포로까지, 바벨론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 구분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는 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1절을 봅니다. 바벨론에 사로 잡혀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고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후에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았다고 합니다. 여고냐가 바로 고니야로도 불리고 여호야긴으로도 불리는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예레미야 22:28~30절입니다. “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다윗의 왕위가 고니야 이후로 끊어집니다. 그런데 지난주일 오후에 사무엘하 7장을 통하여 다윗이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불신앙과 단절을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영원한 왕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16절의 말씀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고 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유다 가문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을 야곱이 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느 지파 출신일까요? 마리아의 친척이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레위지파 출신입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가문의 왕일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도 완성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적인 후손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만드신 분이심을 보았듯이 예수님은 혈통적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입니다(히7:17).


본문 18절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의 마지막이 마리아에게서 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정혼하고서 정식 결혼까지는 동거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친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정혼은 아주 중요하기에 법적으로 남편으로 아내로 부르기도 하지만 동침은 할 수 없습니다. 정혼한 기간에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과부로 지내야 합니다. 그 정도로 정혼은 중요하며 기간은 약 1년입니다. 이 정혼기간이 지나면 정식 결혼식을 하고 동거를 합니다. 그런데 동거를 하기 전에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은 장면을 봅니다.


누가복음 1:26~38절입니다.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다윗 언약을 완성하실 예수의 탄생을 마리아에게 알립니다.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입니다.


신명기 22:20~21절입니다. “20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21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함께 연결되는 단락을 보면 어떤 남자가 결혼하였는데 아내가 처녀가 아님을 알고서 고발을 하면 친정의 부모는 처녀의 혈흔자리를 보여 주어 증거를 삼습니다. 남자가 무고하였다면 은 일백 세겔을 장인에게 주어야 하며 그 아내를 평생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친정에 있는데 임신소식이 들리자 유다가 다말을 행음하였다고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하였습니다. 다말은 목숨을 걸고 유다의 씨를 이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처녀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요셉이 마리를 공개적으로 자기 씨가 아니라고 하면 돌에 맞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도 이러한 각오로 주의 말씀대로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복음 칼럼 란에 은혜를 아십니까? 라는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중국 청도에서 복음전하는 남용모 목사의 글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은혜는 내가 좋은 것을 받으면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목사의 글에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생각이 사단이었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이 다른복음이네, 나는 이것이 필요했는데 주님은 배설물이라고 하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의 괴수가 맞는 거야’ 이렇게 책망을 받으면서 서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은혜를 입은 자는 세상 적으로 보면 신세망친 것입니다. 성경에 은혜 입은 자들은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마리아와 결혼의 꿈을 꾸고 있는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율법의 의를 말합니다. 율법의 의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법정에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에게서 배신감을 느꼈지만 율법대로 처리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임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파혼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뜻도 말해 줍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뜻입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분이라야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두 가지로 한정을 합니다. 자기 백성의 죄입니다. 그리고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의 죄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내 백성의 두 가지 악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한 가지 악으로 인하여 나온 결과까지 포함하여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스스로 살기 위하여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악이란 결국 생명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스스로 선악을 구별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원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에서 구원 얻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올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뜻이 시편 130:8절에 나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130편 전체를 봅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시면 누가 과연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유(赦宥)하심이 주께 있기에 주를 경외합니다. 우리의 죄를 주께서 살피시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심판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서가 있기에 주를 경외합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는데 여호와를 주의 말씀으로 대치합니다. 그 말씀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에게 인자와 풍성한 속량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애타게 기다린 여호와의 말씀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를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제가 종종 강조하여 말씀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신 말씀을 사람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실 지를 예언하였습니다(벧전1:11).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어내셨고 이루고 계시고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의지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루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누가복음 24:44~49절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하신지가 약 2천 년 전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며 이 소식이 성령을 힘입어 모든 족속에게 증거 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믿는다면 이것이 곧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예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죄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주어지는 배경은 구약 이사야 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주어진 구원의 말씀이 얼마나 인간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주어졌는지 보겠습니다.


이사야 7:10~16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남 유다 아하스 왕 때에 북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함께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아하스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 마음이 바람부는 숲의 나무들처럼 떨었습니다. 이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물리쳐 줄 것이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지를 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믿지 못하겠거든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징조도 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두 나라의 연합군을 막아 낼 수 있겠느냐는 불신이 징조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를 책망하면서 주께서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어릴 때에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임마누엘 약속이 얼마나 인간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주어졌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는 이 말씀도 지금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고발하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가 원하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주는 메시아를 원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 되게 하여주는 메시아를 원합니다. 학생은 공부 잘 하게 해 주는 메시아, 취업 준비생은 취업하게 해 주는 메시아, 결혼 준비하는 자들은 결혼 잘 하게 해주는 메시아,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잘 되게 하는 메시아, 교회 개척하는 목사는 교회 부흥하게 해주는 메시아, 사람마다 메시아사상이 다르기에 그들이 믿는 메시아도 다 다릅니다.


이러한 세상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에 아이로 잉태하신 분이 임마누엘이 되심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다는 이 메시아를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누가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고발하면서 주어졌듯이 오늘도 십자가의 예수는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임마누엘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갈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임마누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어내시고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할 뿐 아니라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하실 뿐 아니라 또한 증인이 되도록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사도행전 4:10~12절입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복음은 반드시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전제가 됩니다. 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려내십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이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시면서 자기 백성도 예수님과 함께 살려내십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이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