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6~18  라마에서 통곡소리      2014. 7. 27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ㄷ)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지난주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기에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로 하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이란 다른 곳이 아니라 성전이 있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있는 예루살렘임을 보았습니다. 마치 모세시대 유아살해를 명령한 바로 왕처럼 헤롯이 유아살해를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려는 것을 저지한 바로 왕처럼 헤롯이 출 세상을 저지하려고 합니다. 

16절을 봅니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베들레헴에 대하여서는 앞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오늘 좀 더 보려고 합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떡집에 썩는 양식이 아닌 생명의 떡이 오셨는데 이 생명의 떡을 제거하려고 헤롯이 사내아이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신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생명의 떡을 제거하려는 짓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도 형태는 다르지만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이 아니라 떡만 있으면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성도들도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떡을 먹어야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떡만으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떡을 밥이나 경제로 말해도 됩니다. 경제적인 사정만 좋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생명의 떡이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끊어내려고 합니다. 

시편 2:1~12절입니다.“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를 끊어버리려는 것이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이 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왕이나 헤롯왕이 한 일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비웃으시면서 아들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 왕이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은 세상의 권력으로 이러한 아들의 출현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기에 모든 피조물들은 그 아들에게 굴복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대로 사탄은 이미 십자가로 패배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속아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도록 만들고 있기에 스스로 생명의 떡을 찾을 자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26~27절입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여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어렵다면서 다 떠나 가 버리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너희도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제자들인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35~40절입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생명의 떡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떡이 이 세상에 온 자리가 베들레헴입니다. 이 베들레헴에 생명의 떡을 제거하려고 하는 자가 헤롯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베들레헴에 통곡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을 마태는 라마에서 라헬이 애곡하여 통곡하는 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라마에서 일어난 라헬의 통곡이 무엇인지 구약에서 찾아봅니다. 

창세기 35:16~20절입니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3)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4)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라헬이 언니 레아와 야곱의 자식 낳기 경쟁을 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자식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라헬은 더욱 질투심이 불이 붙어서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게 합니다. 결국 자신도 야곱에게서 아들을 생산하게 되는데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더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이 사라졌다고 하였지만 아들을 더하여 달라고 하고서 임신한 자식이 베냐민입니다. 이 아이를 낳을 때에 산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이라고 할 때에 야곱은  ‘베냐민’ 오른 손의 아들로 이름을 짓습니다. 죽어가는 라헬에게 아들이라는 소식이 기쁨이아니라 오히려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라마에서 라헬의 통곡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예레미야 31:15~22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15절의 라마에서 라헬이 애곡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이 말씀을 마태가 인용합니다. 라헬을 18절에서는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에브라임은 라헬이 낳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에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에게서 오른 손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가 에브라임이기기에 북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 라헬을 18절에서는 에브라임으로 21절에서는 처녀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였는데 다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금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라헬의 통곡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통곡하는 장면과 중첩되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남 유다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라고 합니다.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은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가 포로로 끌려가는 그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울음과 눈물을 멈추라고 합니다. 네 일에 삯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주님께 회개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나 원망이 심하여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네 삯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란 우상숭배만 하다가 자녀가 잡혀가니 통곡하고 애곡한 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에게서 빼앗긴 자녀들이 돌아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하심과 그의 긍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의 소망입니다. 

18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 합니다. 이 탄식은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15절에서 라헬의 통곡과 애곡은 자식이 없어졌기 때문인데 이때는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탄식하는데 그 탄식은 여호와의 징계로 인한 것임을 아는 탄식입니다. 이때 간구가 나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스스로 돌이킬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은 주의 징계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가서 완전히 절망하였기에 나옵니다. 

라마에서 라헬이 통곡하고 애곡하는 것은 자식을 잃어버림으로 인한 통곡과 애곡입니다. 이런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주께서 징계를 받게 하시고 돌이켜 주십니다. 그 징계란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시고 나라가 망하도록 하십니다. 그 망한 자리에게 주께서 애끓는 긍휼로 그들을 돌이키십니다. 그렇게 돌이켜 주실 때에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새 일입니다. 이러한 새 일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일로 마무리됩니다. 이 새 일이 결국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으로 연결이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레미야 31:15절을 인용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통곡하는 어머니들이 그 어떤 위로도 거절하는 것처럼 헤롯에 의하여 아들을 잃어버린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어떤 위로도 거절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31:15절의 단락이 새 언약과 연결되듯이 지금 마태복음에서 통곡하는 자들이 어떤 위로도 거절하지만 이들조차 오직 새 언약으로 인하여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스가랴 선지자가 어떻게 증거 하는지 봅니다. 

스가랴 12: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예루살렘의 구원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심령이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완성되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애통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 앞에 1)이라는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어떤 역본에는 ‘나를’로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의 완성으로 성령이 부어진 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찔러 죽인 자임을 알고 애통합니다. 그 애통이 독자와 장자를 잃어버리고 애통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라마에서 라헬이 애곡하며 통곡하는 이야기를 유대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라헬이 자녀를 낳으면서 죽어갈 때에 무엇이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라헬의 후손들인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멸망할 때에 자기의 아들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무엇이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남 유다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 어떤 위로도 거절합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중에 예레미야도 함께 잡혀가다가 돌아온 자리가 라마입니다(렘40:1). 이러한 라마의 통곡소리가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새 언약을 완성하시고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을 부어주시면 자신의 독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애통하며 통곡하게 됩니다. 이러한 위로를 예레미야가 새 언약으로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새 언약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인 헤롯은 그 생명의 떡을 제거하려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어머니들이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이 임하여야만 십자가의 예수를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찔러 죽인 자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만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누가복음 2:25~33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자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습니다.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위로를 받은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라마에서 통곡하는 라헬이 자기 자식을 잃어버리고 어떤 위로도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위로가 시므온을 통하여 어떤 위로인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위로가 완성되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마리아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 하리라고 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생각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는 조각상을 보면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마리아가 아들로 인하여 그 마음이 칼로 찔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마리아가 결국 그 아들로 인하여 영원한 위로를 받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성령이 임함으로 위로가 됩니다. 이러한 라마의 통곡과 애통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무엇으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직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을 부어주시면 그제야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찔러 죽인 자 임을 알고 독자를 잃어버린 어머니처럼 애통하고 통곡하게 됩니다. 이들만이 참된 위로를 받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