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9~23    나사렛 사람    2014. 8. 3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ㄹ)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여기에 있고 예수는 저기에 있으니 내가 예수를 믿으므로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종교가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을 원한다고 하여도 나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그런 예수 역시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끌려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니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길로 끌려가는 것을 한마디로 하면 별세입니다. 구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던 출애굽이 일어났듯이 신약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별세가 일어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19~20절입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유아 살해를 명한 헤롯이 죽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땅도 애굽이었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다시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은 성도의 출 세상을 보여주시는 것을 출애굽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이 말씀을 본다면 모세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모세가 바로 왕의 신하를 죽이고 광야로 피난 가서 40년을 삽니다. 모세 나이 80세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출애굽기 4: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21~22절입니다. 요셉이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들어가기를 무서워합니다. 헤롯의 아들이 헤롯이 죽고 나자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지역으로 들어가서 나사렛에서 살게 됩니다. 이 지역은 헤롯 안티바스가 갈릴리 지역과 요단강 건너편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아켈라오만큼 잔인하게 통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에게 이곳은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사는 자들로 무시 받는 곳이었으며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23절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사렛 동네에서 사신 것이 선지자로 하신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어느 선지자도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마태의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무엇일까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나사렛과 비슷한 단어들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23절의 각주처럼 이사야 11: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삼손처럼 ‘나실인’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나사렛 이 지역은 구약에서도 그러하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멸시받는 곳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12~17절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ㅁ)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의 성취로 봅니다. 마태 당시의 이스라엘을 간단하게 세 구역으로 구분하면 남쪽이 유다, 중간이 사마리아, 북쪽이 갈릴리입니다. 마태복음 4장의 지명들은 갈릴리 안의 지역들입니다. 당연히 나사렛도 포함이 되는 지역인데 이 흑암의 땅에 빛이 비추었다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기간에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예언된 말씀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3절 각주처럼 이사야 11:1절을 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서 ‘한 싹’은 히브리어로 ‘호테르’입니다. 이것도 메시아 칭호로 사용이 됩니다. 연약한 한 싹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와서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이사야 11장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싹을 다르게 표현한 내용이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히브리어로 ‘네체르’인데 이 어원이 ‘나차르’입니다. 한 싹을 말하든지 한 가지를 말하든지 연약한 모습입니다. 

이사야 6: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난 후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때에 제단 숯불로 입술이 지져지며 그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소명을 받아 가는데 그 역할이 눈과 귀를 막아 버리는 역할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고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있을지라도 이마저 베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있듯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 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씨로 인하여 싹이 나고 가지가 날 것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이사야 11장의 본문을 전체로 봅니다. 한 가지로 나타나는 ‘네체르’가 나사렛과 비슷한 발음입니다. 이런 것을 언어유희라고 합니다.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1장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잘 보았다고 하시면서 나는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살구나무라는 말이 ‘사케드’이고 지킨다는 말이 ‘쇼케드’입니다. 그러므로 한 싹이나 가지라는 개념들은 연약한 개념으로 등장하며 멸시와 조롱을 받는 모습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연약한 가지가 메시아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11:1~5절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연약한 싹과 가지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메시아의 일을 합니다.  

그 결과는 6~9절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메시아의 나라를 그림처럼 펼쳐보여 줍니다. 메시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는 해함과 상함과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없는 나라입니다. 힘으로 차지하는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이 나라에 참여되는 자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말헬할랄바스를 통과하여 스알야숩된 자들이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임마누엘을 말씀드리면서 드린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겨진 자들을돌아오게 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가 10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10절과 16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고 난 후에 돌아오는 자들이 무슨 기치, 무슨 깃발, 무슨 신호를 보고 모여오는 것입니까? 문자적인 단어의 일치가 아니라 연약하고 보잘것없어서 멸시받고 조롱받는 이미지의 순과 가지들을 보고 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순과 가지에 대한 내용들을 몇 곳 더 봅니다.  

예레미야 23:5~8절입니다.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7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출애굽 시키신 분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애굽과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별세시키십니다. 

예레미야 33:14~16절입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수요일 저녁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다윗에게 한 공의로운 자기가 나게 하시는데 이러한 표현들이 다 메시아 칭호가 됩니다. 이런 가지로 인하여 구원이 일어나면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의 의라고 믿게 된 자들입니다. 

스가랴 3:8~9절입니다.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스가랴 6:12절입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여기서는 싹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순이나 싹이나 가지로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많이 예언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메시아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연약한 자로 오신 메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성경에 있습니다. 

이사야 53:1~12절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내용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가지와 순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하고 멸시받는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사람들이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혈통적인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본문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세상의 힘으로 가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힘으로 주변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고난 받는 메시아를 어느 정도로 믿을 수가 없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한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5~49절입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 나무아래서 참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는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이지만 나사렛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그 멸시가 갑자기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나다나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자들이 나사렛 갈릴리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7:52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오라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잡아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하면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무엇을 찾아보라는 말입니까? 구약성경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온다는 것은 알지만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믿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단어인데 마태는 지금 나사렛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참으로 멸시받는 동네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죽임을 당합니까?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는 신명기 21: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죽음임을 압니다. 멸시 받는 나사렛 사람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려 죽는 그 죽음을 죽으신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일이란 인간으로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나사렛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메시아도 다 부수어 버리는 그런 메시아를 전하는 것이 나사렛 사람 예수 그것도 십자가 지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9:17~19절입니다.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빌라도가 예수의 죄목을 이렇게 쓰니 대제사장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하면서 정정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멸시와 조롱과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입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십자가에서 그것도 멸시 받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완성이 어느 자리입니까? 역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죽음의 자리가 다 이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룰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영혼을 자기 백성인 자기 몸에 넘겨주십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한 자들이 증거 한 내용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사도행전 2:22~24절입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반응은 딱 두 가지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든지 돌아서든지 입니다. 사도행전의 결론이 그렇습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평소에 원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채워줄 그런 예수를 믿고자 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멸시천대 받은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십니까? 아니면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지적 유희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십니다. 그 연합이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함께 살려내십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임에 넘겨지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괴물이 부수어지는 과정이며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과정이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