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3 부르심의 길 2013. 4. 7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난주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는데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난주의 결말부분을 다시 보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절을 보시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지키면 안 이루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내용들이 성령의 열매로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이 코스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오늘날 교회에서 잘 말해 주지 않습니다. 간혹 말해주어도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여 맺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나온다면 그런 열매는 또 다른 시기와 경쟁과 질투라는 육체의 열매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이런 까다로운 것보다는 외형적인 일들에 치우치게 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업적들을 내 놓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열매도 말하기에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시적인 업적들이 나와서 좋고 성령의 열매라는 말로 입을 다물게 하지만 이런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환난만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피하고 싶은 모든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온유하게 하고 오래참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환난이 오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사람과 환경들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저 사람만 없었으면, 이 환경만 바뀌어 진다면,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은 아직 자기 속에 있는 자아라는 우상이 깨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아는 허상입니다. 그러함에도 죽을 때 까지 우리를 있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깨어지는 것은 결국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입니다(삼하7:14). 이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복이며 사랑입니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먼저 다윗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다윗이기에 성경을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전체적인 내용을 통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막내로 목동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버림을 받고 새롭게 왕으로 세울 자를 기름 붓기 위하여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새가 막내 다윗을 양을 돌보게 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을 데리고 제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서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 인줄 알았습니다. 그 키와 용모가 탁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머지 다른 아들들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합니다.

 

이새가 대답하기를 아직 막내가 있는데 그는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형들이 제사에 참석하는 동안 제일 어린 막내는 양이나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그가 오기 전에 식사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데리고 왔는데 그는 동안의 소년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울이 악신이 들려 괴로워할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타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자기의 무기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목동에서 왕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골리앗을 이긴 사건은 이스라엘 전체에 영웅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대승을 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며 환영하는 노래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승리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한 것인데도 백성들은 다윗을 찬양합니다. 이 소리로 인하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니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두 번이나 맞게 되지만 사울을 살려줍니다. 나중에 사울의 머리를 들고 온 자도 죽여 버립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윗을 본받자는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기이기에 자신의 손으로 해하지 않겠다고 하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본받자고 합니다. 왕이 된 후에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불러서 왕의 식탁에 앉게 합니다. 얼마나 관대한 모습입니까? 이런 일들이 다윗 자신의 능력이라면 다윗이 칭찬을 받아 마땅할 것이며 존경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실상은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안정된 상태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과 살인입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였지만 이것이 죄인 줄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백한 내용이 시편 51편입니다.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의 죄를 대신하여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는 우리아와 같은 자가 대신 희생을 함으로 용서 받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압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목동에서 왕이 된 것은 인간의 죄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시편 51:4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다 하시리이다” 자신의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한 것을 시인하면서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의롭다고 순전하다고 하여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뻔뻔한 고백을 합니다. 아니 간음과 살인을 하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제대로 알았다면 심판을 당하여 마땅하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말씀하실 때에 의롭다고 하여 주시고 순전하다고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로마서 4:6~8절을 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로 앞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복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일한 것이 없는데도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아브라함도 받았고 다윗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일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한 다윗이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있다가 왕이 된 것이 복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 알고 오직 대속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만이 진짜 복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은 겸손할 수밖에 없고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사건을 봅니다.

 

첫째 사무엘하 15:24~26절입니다. “24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언약궤가 가는 곳에 민심이 따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도로 성으로 메고 가게 합니다. 여호와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정병 삼만 명을 동원하여 가려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에 레위인이 어깨로 메고 간 언약궤를 이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에 맡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둘째. 사무엘하 16:5~14절을 봅니다. “봉독”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다윗을 향하여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시므이는 사울집안의 사람이기에 다윗을 향하여 저주합니다. 이때 왕의 좌우에 용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비새가 말하기를 이 죽은 개가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하면서 내가 그의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그로 하여금 저주하게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그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고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겸손이 나오는 지점이 아들에게 반역당하고 쫓기는 중에 시므이의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이 이런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입니다. 디모데전서 1:14~16절입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복음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향하여 어떤 모습인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19~23절입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겸손과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에 참여하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이 코스로 인도하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코스로 끌려가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알게 될수록 은혜도 깊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용납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자들이 마음의 쉼을 얻습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통하여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는 사람들이 부르심의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