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6 하나인 몸, 성령, 소망 2013. 4. 21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지난주에 하나 됨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보았습니다. 하나 됨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그 하나 됨 속에 자기 백성도 함께 그 하나 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기 백성에서 부어주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 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려고 합니다.

 

4~6절을 보시면 하나 됨에 대하여 일곱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 됨에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말씀합니다. 성령과 주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 되게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몸, 소망, 믿음, 세례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란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라고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심을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일하신 결과로 몸과 소망과 믿음과 세례가 하나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오늘은 몸과 성령과 소망의 하나 됨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7:1~4절을 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다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종노릇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법이란 선악과입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시는 주체가 되시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선악의 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선악이라는 법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늘 저지르는 죄가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기중심적인 선악의 판단을 날마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결정하시고 판단하셔야 하는데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로 살겠다는 것이 근원적인 악입니다. 이러한 죄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받은 자들이 이 율법으로 자신들의 죄를 아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율법의 의로 자기들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 또다시 선악을 판단하며 살았습니다. 그 선악판단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알라고 주신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7:4절을 보시면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만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는 더 이상 율법이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자기 백성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며 또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발생되는 그 의를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의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된 자기 백성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가 없습니다. 옛 남편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에 새 남편인 그리스도에게로 시집와서 그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살을 채우시고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서는 이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하는 관계의 단절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의 단절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이웃과의 단절이면 땅마저 저주를 받아서 동식물들도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자기와 한 몸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아담의 옆구리를 통하여 여자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교회가 나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절입니다.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잔과 떡이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2:19~20절입니다.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새 언약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돌 판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하나이며 성령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어떤 죄인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사는 자 임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된 자들이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27절을 봅니다. “봉독” 사람의 몸을 비유로 그리스도의 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 중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한 성령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물을 마시듯이, 공기를 들이마시듯이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함으로 한 몸이 된다는 말은 성령님이 임하셔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한 몸의 특징은 서로 분쟁이 없습니다. 서로 서로 도와가는 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한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 분쟁과 파당이 생기느냐고 바울사도가 책망을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 이라는 것이 한 성령이 임하여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파당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늘 이 싸움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때는 같은 믿음이라고 좋아하며 한 형제라고 하다가 어느 날 배척합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에 진리의 문제이기 보다는 감정으로 문제로 봅니다.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 자기와 좀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면서 정죄하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한 몸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자신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전적인 죄인임을 인정하고 구원 받는 것도 버림 받는 것도 오직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인정하면 한 몸으로 본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말도 따지자면 얼마든지 따지고 시비를 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성령이 임하였다면 약간의 차이와 다름은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신앙의 고백은 같습니다. 그래서 한 성령이 임하여 한 몸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의 세례입니다.

 

로마서 6:1~9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입니다. 고대의 사형형벌 중에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꽁꽁 묶어버리는 형벌이 있다고 합니다. 산자가 죽은 자아 함께 묶였기에 그 죽음이 그를 죽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묶어버립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그곳에 함께 묶어서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이심으로만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죽은 자 만이 부활에도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이며 한 성령의 일입니다. 이렇게 한 성령을 받아 마신 자는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몸은 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을 가졌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소망을 보면 됩니다.

 

시편 62:5절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다윗이 핍박당하는 중에 나온 고백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이유는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3절에서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라고 합니다. 믿고 의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사람이 입김이며 속임수라서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가 무겁게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가벼우니 자꾸만 자기의 소망을 무겁게 가지는 것입니다. 가볍게 살다가 가면 되는데 자꾸만 무거운 소망을 가집니다.

 

시편 62:9절을 새 번역과 공동번역으로 함께 보겠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고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도 가볍다.” 인생이 이렇게 가벼운데 그런 자들이 꾼 꿈도 일장춘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1~8절입니다. “봉독”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 또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에 이르는 과정은 환난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 아닌 것들을 환난을 통하여 흔들어서 떨쳐 버리고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소망이 분명해 지게 합니다.

 

로마서 8:18~30절입니다. “봉독”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아 성령으로 하나 된 자들도 주와 함께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우리에게 약하기에 성령님께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데 그 믿음의 실체와 증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을 이룬 자들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서로 격려하며 걸어가는 성도의 걸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