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6 한 분 하나님 2013. 5. 12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주도 한 분이십니다.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일곱 가지의 하나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한 분으로 말합니다. 한 분이라고 하신 것은 사물이 아니라 위격(位格)이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세 분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세분 하나님이라고 하면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삼신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로도 성자로도 성령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까? 여기에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양태론이라는 이단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말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셋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데 혼합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구별되는 삼위일체가 되느냐는 것은 우리의 말과 표현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히 성부도 하나님(갈1:1. 하나님 아버지) 성자도 하나님(요20:28. 나의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행5:3~4.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영존하시며 서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부르는 한글로 된 하나님에 대하여도 알아보아야 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한글번역 성경의 이야기를 올려놓은 것을 옮겨봅니다.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번역의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신명을 “하느님”으로 정했다는 점일 것이다. 로스 목사는 당시의 선교 보고서에서, “하늘”(heaven)과 “님”(prince)의 합성어인 “하느님”이 가장 적합한 번역어일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참신, 상제, 천주” 등 여러 이름이 검토가 되었지만,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이름을 신명으로 정한 로스 번역 팀의 선택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 이름은 그 후로 “하 님”과 “하나님”으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된다.

 

가끔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 묻는 분들도 있고,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은 다르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로스 목사님이 처음에 정했던 설명 그대로, “하늘+님”의 결합어로 이루어진 말을 한국 교회에서, 그리고 한국어에서, “하느님”으로도 쓰고, “하나님”으로도 써온 것이다. 이 두 말은 어떤 말이 옳거나 틀린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복수표준어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느님을 개신교에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의미까지 담아서 “하나님”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이 말은 “하나”라는 숫자에 “님”을 붙인 것은 아니다.“

 

위의 설명에서 하느님과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968년에 한국에서 신, 구교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하기로 하여 나온 성경이 공동번역입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개신교는 사용하지 않고 가톨릭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한국에서는 하나님과 하느님이 싸우는 형국입니다. 또한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신교 안에서도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한 분 하나님이라고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각자가 믿는다는 하나님이 다릅니까?

 

지난 수요일 저녁에 예레미야 2:28절 말씀을 보니 유다의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이 성읍의 수와 같다고 합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데 그들의 수가 성읍의 수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 마음에 탐심을 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우상인데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의 현실도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나누어지는 것은 각자의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한 하나님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8:12~19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참되지 않다고 합니다. 증인은 한 명으로 안 되고 두 명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고 합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나를 알았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를 모르면 다른 아버지입니다.

 

요한복음8:31~59절입니다. “봉독” 상당히 긴 본문입니다만 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시면서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여야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들이 너희의 죄를 용서하여야 너희가 아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을 곳이 없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38절을 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너희의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음란한 데서 나지 않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옛님은 이들의 아버지가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진짜 한 분 하나님이신데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귀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한 하나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를 사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부른다면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아버지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을 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께로 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이 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러 모양의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나가는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가 소속된 교단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뒷전입니다. 자기의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예수님도 성령도 끌어대면서 자기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고 여기고 믿는다고 여긴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한 분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1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분이 또한 성령입니다.

 

요한복음 16:7~15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합니다. 떠나신다는 것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십니다(행2:33)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죄에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이 진리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임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것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것은 또한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또한 예수님의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의 뜻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 됨을 알게 됩니다. 이 하나 됨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실 뿐 아니라 성령이 임한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24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보내주시면 영원토록 함께 거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서 세상은 받지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말씀합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이 그들 속에 계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성도를 거처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한 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유란 중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를 만유로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절대 초월자로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범신론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한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자기 백성을 거처 삼으시고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내용들은 우리가 원하거나 선택하여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한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 됨 안에 자기 백성도 그 하나 됨에 참여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