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에베소서 4:17~20 허망(虛妄)한 것 2013. 6. 30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자랍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람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자람이나 성장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세상에서 자람과 성장을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의 크기로 말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매출의 양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영향력 있는 논문의 발표수로, 가수는 더 인기 있는 노래로, 종교사업자들은 더 많은 종교 사업으로 성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자람이란 사랑 안에서 진리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깨어지고 손해보고 죽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 보게 될 4:17~24절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자라게 되는지 그 방향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역예배 때에 골로새서를 보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전’과 ‘이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전에는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옛 사람이라는 이전의 삶이 있었고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새 사람이란 우리가 거듭났기에 이제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하는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세워지는 것임을 지금까지 보았습니다. 이 목표가 묵시 속에서는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아직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것임과 동시에 이 땅에서도 발 딛고 삽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 땅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직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남아있기에 그러합니다. 그 일들이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1:20~24절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것이 바울에게만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는 새 사람의 목표와 내용입니다.

 

오늘본문 17절을 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접속사가 받는 최소의 단위가 4:1~16절입니다. 물론 이 단락은 또 앞의 단락을 받기에 그러므로 라고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나가면 결국 1:1절부터 다 받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말씀을 성경 각 단락의 제목만이라도 보겠습니다. 제가 보는 성경의 소제목은 이렇습니다. 1:1~14 서론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하나님께 찬양함. 1:15~23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위한 기도. 2:1~22 은혜의 선물로 새로운 삶. 3:1~13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 3:14~21 교회를 위한 사도의 중재 기도. 4:1~16 성령 안에서 하나 됨과 은사의 다양성. 이런 제목만 들어도 그동안의 대략적인 내용이 기억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바탕으로 ‘그러므로’ 라고 시작합니다.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한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1:1~4:16절까지를 이해 한 자들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앞에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씀들을 다시 율법의 조문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앞에는 교리이고 뒷부분은 실천사항이라고 합니다. 바울서신의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앞부분은 은혜이지만 뒷부분은 우리가 책임지고 이루어 내어야 할 일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이루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도 나옵니다. 이루어내지 못하면 탈락하는가? 탈락은 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하늘에서 상이 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들이 나옵니다.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은 앞부분을 이해 못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간략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입니다. 그 결과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그 가운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넘치는 사랑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 사람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실천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야 하는 이 부분도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내시고야 마십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목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뜻대로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자녀를 이런 저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전능하시기에 이런 사람을 만들어 내시겠다고 하시면 천하 만물을 다 동원하셔서라고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는 고난이 많습니다.

 

골로새서 3:1~17절을 봅니다. 제가 봉독(奉讀)할 때에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시면서 내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 사람인지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봉독” 어떻습니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찾으십니까? 땅에 있는 지체인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인 우상숭배를 죽이고 계십니까? 그런데 아직도 땅의 것만이 나의 삶의 전부요 목표라면 그 사람은 새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었다면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어쩔 수 없이 땅의 것도 구하며 살아가지만 이것이 나의 삶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새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빚어내십니다. 그 과정이 성도에게는 고난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은혜인데도 은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이 땅의 것들을 사랑하기에 그렇습니다. 썩어질 것, 허망한 것, 헛된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제거하시는 것이 사랑인데도 우리는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아는 자가 새사람입니다.

 

다시 본문 17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한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같이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이란 바로 옛 사람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란 그 사람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분명히 허망한 것인데도 허망한 것으로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마치 여인들을 외모로 점수를 매기고 상품화 하여 진선미를 매기는 수준입니다.

 

마음의 허망함으로 행한다고 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흔히 인격이라고 하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다 동원된 전인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꿈꾸고 소망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전부가 허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을 세 가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숭 떨지 마시고 정말 당장 이루어지고 싶은 소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소원들이 50년 후에도 여전한 소원일까요? 허망한 것일까요?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소원이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전도서 1:1~3절입니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솔로몬은 지혜와 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거기에 왕이라는 권력까지 있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또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들을 지상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것들로 다 누려보았습니다. 우리는 금이 귀하다고 반지와 목걸이를 하지만 솔로몬은 모든 그릇이 금이었습니다. 그의 침대는 상아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이 어떠합니까?

 

전도서 12:13~14절입니다.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허망한 것을 쫒아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허망할 지라도 그런 호사를 누려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신이 주는 유혹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이 선악과의 유혹인데 이것을 인생들이 아무리 취하여도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기에 만물이 다 피곤합니다. 이런 허망한 것을 신약에서 두 곳을 봅니다.

 

로마서 8:20~25절입니다.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에베소서의 허망한 것이 로마서 8:20절에 허무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생을 허무한데 굴복하며 살아가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3:17~18절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신이 되려고 선악을 판단하면서 엉터리 주체로서 살기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몸의 구속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다 탄식하며 살게 되지만 세상의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소망이 다릅니다. 허망한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는 그 소망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사람은 보이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그 나라를 소망하기에 허망한 것에 몰입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몸을 가진 연약한 자라서 허망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면 그 허망한 것이 허망한 것인 줄 알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인데 우리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님과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2:18~22절입니다.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에베소서의 허망(虛妄)한 것을 허탄(虛誕)한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이 허탄한 자랑으로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자유를 준다고 하지만 자유가 아니라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탄한 것들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