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7:1-5 큰 음녀의 받을 심판 2009. 12. 27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한해에 52주일이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런 때는 아무래도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내촌감삼이라는 사람은 일일일생(一日一生)이라는 매일 묵상 집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루가 일생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성도란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왜 하루살이 인생인가 하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는 것은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밤에 내 영혼이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기에 오늘 하루를 주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의 이론은 참 쉽습니다. 이론은 알겠는데 실천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살려고 하여도 자꾸만 염려가 되는 것을 내가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정말 내일 일에 대한 염려만 없다면 마음이 쉼을 얻을 텐데 왜 자꾸만 염려가 오는 것입니까? 나의 노년은? 우리의 자녀들의 장래는? 이런 염려가 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에서 단절된 우리는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염려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설교시간에 팔손이 나뭇잎을 하나 뗐습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뗐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살기 위하여 아무리 애를 써도 나무에서 잘려지면 죽는 것입니다. 2주 후에 다시 그 잎을 보여주면서 손으로 만지니 바삭하고 부서진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연약한 육체를 말할 때 ‘바사르’라고 합니다. 바삭 하고 부서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의하여 죽어가는 인생입니다.

 

이런 연약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이어가려니 땅에 속한 것을 얻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습은 이 땅에 속하여 이 땅의 것을 소유하여야 내일의 염려에서 놓이게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이든지 종교이든지 우리의 불안한 삶을 든든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국가는 부국강병을 이루어서 삶이 든든하게 보장되도록 하고 종교는 심리적인 든든함과 내세까지 책임져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가가 약속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제성장을 말합니다. 또 복지국가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든든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국가를 누가 적극지지하면서 나서는 것입니까? 종교입니다. 종교가 국가를 위협하면 국가의 권력으로 그런 종교를 제거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사상은 해탈인데 오히려 호국불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교는 그 사상 자체가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바탕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기독교가 초기에 핍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땅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바벨론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1절을 봅니다. 일곱 대접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말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말한다는 것은 이 장면도 일곱 대접 재앙의 연속인 것입니다. 일곱 대접이 쏟아질 때 ‘다 되었다’는 음성이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의 재앙이 마지막 심판이며 이 심판의 종결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본 내용 중에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또 우박이 쏟아지는데 그 우박의 크기가 한 달란트 약 60킬로그램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쏟아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듯이 이제 온 세상에 재앙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출 세상을 하는 것입니다.

 

1절 중반을 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이리오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보여준 내용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물은 무엇이며 큰 음녀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물은 15절에 나옵니다.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많은 물이란 온 세상의 나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녀란 그 나라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가장 큰 국가권력을 말합니다. 이것을 큰 음녀라고 합니다.

 

2절을 봅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이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큰 음녀란 요한 당시에 가장 큰 권력인 로마이고 이 로마와 무역하며 그 영향력 아래 있던 나라들을 땅의 임금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의 임금들이 이 로마와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음행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만큼 거대한 로마 제국을 음녀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들이 국가권력에 아부하는 것을 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인 국가권력에 땅에서 나온 짐승인 종교권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3절을 봅니다. 성령으로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보여줍니다. 광야란 이스라엘에 있어서 연단의 장소입니다. 이런 곳에서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일곱 뿔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용과 뿔을 그리는데 이것은 나라와 임금들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열 뿔은 열 왕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다음 주에 다시 보기로 합니다. 이 음녀가 어떤 모습으로 나옵니까?

 

4절을 봅니다.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었습니다. 로마시대의 이런 옷은 고급 옷이며 귀족들과 왕족들이 입는 옷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있습니다.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국가나 개인이 이 땅에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심지어 종교마저 추구하는 바가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귀족이 되고 왕족이 되고 좋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금으로 된 잔에 비싼 와인을 따라가면서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5절을 봅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밀이라고 합니다. 왜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는 바벨론이 없습니다. 고대의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고 멸망시킨 제국의 세력이 바벨론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 당시에 성도를 공격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세력이 로마라는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은 성도를 핍박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상담을 하기에 교회마저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큰 바벨론이며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6절입니다. 이 여자가 즉 큰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입니다. 이 큰 음녀가 왜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을 죽인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음녀가 하는 일이 바로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 함으로 쫓겨난 죄인들이 스스로의 왕국을 만들어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는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에 절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그 권력에 절하지 아니하면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시는 잔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은 이 세상이 멸망당할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 음녀로 보입니까? 국가와 종교라는 것이 음녀로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교회에 와도 세상이야기뿐입니다. 국가가 잘되고 교회가 잘되고 내가 잘되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 잘됨이란 큰 음녀처럼 좋은 옷을 입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금잔을 들고 마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음녀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음녀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행하였다고 책망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의 특징이 바로 바벨론의 음녀가 제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권세입니다. 피조물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쁨과 행복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로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늘 음행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풍요를 주는 바알이 더 좋은 것입니다. 거룩한 성경의 말씀보다 온갖 육체적인 쾌락을 주는 아스다롯이 더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 쾌락 이런 것들을 주는 우상들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런 음행만이 아니라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애굽을 의지합니다. 앗수르가 강하면 앗수르를 의지하고 바벨론이 강하면 바벨론을 의지합니다. 외교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음녀인 바벨론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의 음행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11:2-4절입니다.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지역은 참으로 음행이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도 정결한 처녀로 남편 되신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정결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의 직업이 창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정결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매를 해 놓았는데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시키려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음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을 주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다 제시하는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3박자 축복과 같은 것이 우리민족의 심성에 꼭 들어맞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머니들의 교육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글로벌한 인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벨론인데도 이런 바벨론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음녀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음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음녀라는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쥐고 있는 그런 음녀를 좋아하며 따라가는 작은 음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도 얼마든지 이런 음녀의 세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안 그런가요? 회계 장로님이 제 앞에 오시면 한숨을 쉬시는데 숨이 가빠서 그런지 아니면 연말 결산과 새해 예산을 세우려니 답답해서 그런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후자인 것 같습니다.

 

목사가 좀 교인들에게 잘해서 분위기도 좋게 만들고 그러면 헌금도 잘 하면 경상비가 달랑달랑하지 않을 텐데 이런 답답함이 있을 것이라고 제 혼자 생각을 해봅니다. 회계 장로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게 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도 음녀의 기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교회는 분위기 좋게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음란한 여인이었다고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큰 음녀가 받을 심판만 함께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