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녹화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9:11-16 만왕의 왕 만주의 주 2010. 2. 14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민족 최고의 명절이라는 설날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잘 아는 날과 겹쳐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중세 때 왕이 전쟁에 남자들을 보내기 위하여 결혼을 금지한 때에 결혼주례를 섰다가 죽임 당했다는 어느 신부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초콜릿 팔아먹는 상술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초콜릿회사가 울상이라는 것입니다. 설날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초콜릿이 예전처럼 팔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평소에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막상 더 중요한 것이 닥치면 지금까지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고우영 만화삼국지를 보면 관운장이 먼저 억울하게 죽습니다. 그러자 장비가 복수를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설쳐 되자 죽은 관운장의 혼이 허허하고 웃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이나 명절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부활절 이런 절기를 교회들이 중요하게 지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수장절이라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오실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거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보다는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부활절이 훨씬 더 매력이 있기에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인기 있는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실 때 까지 자신의 죽으심을 증거 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만이 영생이기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기는 하지만 빨리 지나가야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아직도 십자가냐고 하면서 그 이후의 영광을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복음의 비밀은 십자가 안에 감추어 두시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왕과 같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는 놀라운 운명에 참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무시당하고 망각되고 멸시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능력은 그분의 무능 속에,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초라함 속에, 그분의 승리는 그분의 패배와 고난과 추방당함과 범죄자의 죽음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 교회는 그분의 연약함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런 글을 보면 오늘날 교회가 가는 방향과 정 반대임을 보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당한 그 고난의 의미를 모르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라면 그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길을 외면하고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성도요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참된 명절을 기다리는데 그 명절이란 바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인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라면 예수님 다시 오셔서 교회의 신랑이 되어주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세상의 명절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절이라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날입니까? 여자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여자의 눈치를 보는 남자도 스트레스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참된 명절이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계시록 19:9절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이 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예수님의 천국비유 중에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자기 종들을 보내어 청한 사람들을 오라고 하니 오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진수성찬이 마련되어 있다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가고 사업차로 간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이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다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 되었으나 청한 자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합니다. 이제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손님들을 보려고 나갔는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느냐고 물으니 아무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지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 편은 통곡인데 한편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진멸당하는 무리와 함께 버림받는 자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청함을 받은 자들이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정통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잔치에 오라고 청한 종들을 죽이고 예수님마저 죽여 버린 자들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노하여 그들을 심판합니다. 잔치자리에 한 편은 진멸당하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종들을 보내면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 중에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포함이 됩니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예복입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고 그 어린양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것은 이 세상 전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복된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랑 되신 어린양이 이 세상에서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인데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무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내쳐버린 그 분이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에 이제 그의 만왕의 왕 되심과 만주의 주가 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11-12절을 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봅니다. 우리도 하늘이 열린 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이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면 우리도 요한이 본 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본 것이 무엇입니까? 백마를 타신 분이 보입니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충신과 진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백퍼센트 다 순종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 눈을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습니다.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는데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13-14절입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승리하신 왕으로서 오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는 신랑이 되시지만 심판받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따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옷이 피가 뿌려져서 붉은 것입니까?

 

이사야 63:1-6절을 봅니다. “1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계시록 18:24절을 다시 봅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이 왜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망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경제든 교육이든 종교이든 모두가 이 세상의 발전을 이야기하고 희망찬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내겠다는 이런 희망찬 미래란 결국 바벨론의 음녀에 취한 모습입니다.

 

그 바벨론의 음녀의 배후는 옛 뱀이여 용이며 사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왕국을 세워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다 들어있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단의 미혹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런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낯선 사람취급 받고 따돌림 당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서 복음을 증거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합류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물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만 그러다가 호되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하는 것이 성도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옵니다. 그것으로 만국을 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그 말씀으로 심판을 하시는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기에 그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역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대로 미리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어떠한 예리한 칼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권세란 시편 2편에 예언된 대로 철장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왕들과 관원들을 심판하시는 권세가 철장권세인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이런 호칭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이 이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만왕의 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