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1~28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2018. 9. 9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살펴본 대로 심판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이든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때에 그들이 갈고리나 낚시에 꿰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세상에 대한 심판의 소식이며 그 심판의 소식에 회개하는 자들은 낚시에 걸린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됩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그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십니다. 가버나움도 갈릴리 호수근처의 마을입니다.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갑니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생긴 유대인들의 모임입니다. 유대인 성인 남자 10명이면 회당을 하나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안식일마다 성경을 읽고 찬송도 합니다. 그리고 회당장이 회당에 들어온 유대인 성인 남자를 지목하여 성경을 읽게 하고 그 성경 말씀에 대하여 강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의 내용은 없고 회중의 반응만 나옵니다. 회당에서 하신 말씀의 내용은 누가복음 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랍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자들의 반응입니다. 유대인들의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그들의 스승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우리의 스승 누구의 해석은 이렇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의 권위는 모세에게까지 소급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가르쳤다는 그런 말들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본 대로 너희는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라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23~24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놀라기는 하지만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귀신 들린 자는 정확하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그렇다면 이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귀신의 말입니다. 귀신이라고 하니 중고등부 학생들은 여름에 나오는 공포영화의 귀신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무엇이 귀신인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며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봅니다. 그러면 귀신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귀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입니다. 성경의 용례로 영혼, , 성령, 심령, 기운, 바람 등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귀신이라고 하는 이유는 프뉴마라는 단어 앞에서 더러운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더러운 단어가 붙어서 더러운 영, 곧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이라는 단어를 빼면 성령, , 영혼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런 내용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한국의 토속적인 귀신 이야기의 개념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다이모니온이라는 단어가 또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11:18). 거라사 땅의 귀신 들린 자도 다이모니온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용되는 마귀, , 옛 뱀, 사탄(20:2)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들이 사람들을 지배하여 사람의 생각들을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원수들의 최초의 등장은 에덴동산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하나님 절대 의존의 존재에서 스스로 독립하게 한 대적자입니다.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 대적이 될 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도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 하와를 만났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에 뼈며 살 중의 살이라는 거룩한 연합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여자가 나에게 먹으라고 해서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것이 더러운 귀신과 사탄의 일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고 합니다. 내가 아벨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대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제목을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였는데 전체 제목이 너무 길어서 주어를 뺀 것입니다. 제대로 제목을 붙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한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이 제목입니다. 제목 삼을 내용이 없어서 더러운 귀신의 말을 제목으로 삼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말이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모든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고유영역을 누가 침범하면 당신이 왜 내 영역을 침범하느냐고 따집니다. 그것이 나만의 공간이든, 나의 생각의 영역이든, 나의 뜻이든 간에 누가 간섭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따집니다. 이것은 가족이든 목사든 하나님이든 간섭하면 적대시 합니다.

 

본문 23~24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실 때에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평소에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예수님 앞에서 발작을 하듯이 했다면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무런 일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니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당신이 우리를 간섭하러 왔느냐고 합니다.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이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될지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를 멸하려고 왔느냐고 물으면서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귀신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으니 그 사람이 하는 말로 보입니다.

 

25~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향하여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에서 보고 오늘날도 이런 식의 흉내를 내면서 귀신을 쫒아낸다고 합니다. 성령 운동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합니다. 지난주 어느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성모동산이라는 곳에서도 이런 짓을 합니다. 무당들도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서 과연 예수님의 말과 권세가 드러나는가를 보면 전부 가짜입니다. 그런 일들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 몰려가는 이유는 자기의 병을 고쳐보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 고침 받아도 결국 다 죽어간 인생들입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 받아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려고 하시는지 바르게 아셔야 합니다.

 

27~28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신이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다 놀라 서로 말하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놀라면서 하는 말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한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릴 사방에 퍼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소문을 다 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더러운 귀신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본 대로 귀신 들린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귀신이 사람들에게 심어놓은 사고방식입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인간들은 스스로 신으로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만민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옥과 같은 세상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신의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고 살기에 누가 나에게 간섭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자신의 모습을 보시면 압니다.

 

디모데전서 4:1~5절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디모데전서 3:16과 연결하여 봐야 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경건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선포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이란 성령을 말하는 프뉴마인데 그 앞에 미혹하는 단어가 붙음으로 귀신의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영이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그 사람의 말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혹이 초대교회 때에 영지주의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들은 쾌락주의로 나가기도 하고 금욕주의로 나가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금욕주의로 나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혹의 영이나 귀신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경건의 비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야고보서 3:13~17절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기서도 귀신의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로서 온 것이 아니라 땅 위의 것이며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복 받고 하늘나라에서 상 많이 받기 시합을 한다면 반드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교회생활이 과연 위로부터 온 지혜인지 땅의 것이며 귀신의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8:1~3절을 봅니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1)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1)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바벨론이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이 다 몰려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 자체를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을 귀신의 처소이며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이 멸망한 것입니다. 언제 멸망하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멸망한 것입니다. 모든 원수들을 십자가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아직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를 믿는 것은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십니다.

 

이어지는 4절을 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서 바벨론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은 붙여두었지만 그곳에 온갖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가득하다면 그곳이 바벨론이며 귀신의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린 자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이나 믿으세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러한 나의 주체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 됨이 무너지고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으로 사사건건 간섭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사십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이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