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4~20 향기로운 제물 2018. 7. 8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2)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2)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지난주에 자족함을 배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족함을 배웠다는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온갖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 배운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옥에도 많이 갇히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함과 이방인의 위함과 시내와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자기들의 외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아직도 자신 속에 눌리는 것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약하면 자신이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자신이 애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 결론은 자신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인도하여 가시는지를 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자족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길은 증거 하는 자도 그런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10~1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로부터 다시 연보를 받고서 기뻐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자신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4~16절입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그 고난에 빌립보 교회가 동참한 것이 연보를 보내고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복음의 시초에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었고 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두 번이나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또 에바브라를 통하여 바울에게 연보를 보낸 것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연보를 더 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17~18절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앞에서 말한 자족을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합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무엇이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겠습니까?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일체의 자족을 배웠기에 이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이런 말씀이 나오면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런 말이 왜 나오는 거냐고 말입니다.

 

사도행전 17:22~25절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지금도 엄청난 신전들이 즐비하게 유적으로 남아있는 아테네에서 그 신전을 지어 바치는 그 종교성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신은 정성을 바치겠지만 혹 모르는 신이 있어서 정성을 바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해를 받거나 복을 받지 못할까 생각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신전도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민에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1:35절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이 말씀을 사도행전 17장의 말씀과 함께 보면 사람이 신에게 정성을 바쳐서 내가 소원하는 것을 얻어 내겠다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감히 주님께 무엇을 먼저 드림으로 갚으심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한 것을 바울사도는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구약의 제사적인 표현인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종교성으로 신과 거래하기 위하여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바치는 것을 성경은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인간이 아예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홀로 창조하시고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고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타락합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자신이 주인인줄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이라는 것은 현대 철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말하면 현대 철학자들은 낭만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말한다는 교회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으로 신과의 거래를 독려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종교놀음을 하는 것인지 모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6절을 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5절과 연결하여 보면 인간이 주께 무엇을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인간이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것을 드렸으니 신이 나에게 무엇을 보답해야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아주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크신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받아주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용납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것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제물이 거절당함으로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기에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고백을 다윗이 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고 백성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역대상 29:14~16절입니다. “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다윗과 바울이 같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을 준비하면서 모든 예물들을 기쁨과 감사로 드리면서 찬양하는 것은 그림자 같은 사람의 것을 받으시는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주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빌립보 교회의 연보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소유를 스스로 드렸다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정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정성을 바침으로 신이 그 인간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인간의 종교성을 받지 않으십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나에게로 오는 그런 방식이 종교성입니다. 이런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왜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연보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들의 통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나타난 것이 빌립보 교회의 유익이라고 합니다.

 

본문 17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내가 선물 곧 연보를 원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이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내가 선물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일뿐입니다.” 여기서 유익한 열매나 이익이 우리는 무슨 말로 보입니까? 연보를 많이 했더니 복을 받았다는 식으로 봅니다. 그래서 선교를 하면 개인이 복을 받고 나라가 복을 받으니 우리가 선교를 많이 하자고 합니다. 이것은 다시 거래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참여하는 그 자체가 유익한 열매이며 이익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옥에 갇힌 바울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나 모든 초대교회는 안팎의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성함이란 단지 물질적인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적인 가치척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라는 말씀을 연보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하면 크게 부자가 되게 하여준다는 방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8: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기에 이방의 교회들 특히 마게도니야 지역의 교회들이 연보를 하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니야 지역의 첫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연보를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입니다. 은혜가 임하여 이런 마음으로 하였기에 이것은 자기들의 행위라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극심한 가난이 어떻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한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함몰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돈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로 된 것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공로나 자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난해 지심이란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연보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하게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신다는 것을 자본주의의 풍성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사도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결코 물질의 풍성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넘치게 연보한 것은 세상이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연보로 받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짊어지시고 그리스도에게 모으셔서 아버지께로 이끌어 가시는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빌립보 교회와 바울사이에 연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타난 일이기에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향기로운 제물이기에(5:2) 그리스도 안에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