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27~30 복음에 합당한 삶 2018. 2. 18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4)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5)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27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합니다. 그냥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고전15:4). 이것이 성도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혼자의 죽으심과 부활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는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2:3~8절입니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런 말씀을 자꾸 반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잘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이야기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설날에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 어떤 인사를 주고받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신 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이런 성도는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호적이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의 호적이 혈과 육의 호적에서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양자로 입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위에 있는 것이란 그리스도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내용을 추구하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이 땅에 속한 것들만 복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골로새서 3:5~6절의 말씀을 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땅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 탐심인데 이러한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다시 본문 27절을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합니다. 생활하라는 단어의 각주를 보면 시민 노릇하라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시민 노릇을 하라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의 은퇴군인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도시입니다. 로마가 지배하기 전에는 로마인들이 볼 때는 야만족이 사는 곳이었기에 로마가 그곳을 지배하면서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그런 자랑거리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빌립보서 3:20~21절입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이미 하늘에 속한 시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 그 어떤 곳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시민노릇을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다시 본문 27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지 세 곳의 말씀으로 확인을 하였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이 이렇게 세워져 있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 안에서도 한 마음이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 교회에 내가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듣기 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 같은 믿음과 다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한 뜻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서 한 마음이라는 단어에 또 각주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영, 한 정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인본적인 뜻으로 한 마음을 가지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남북 단일팀을 만들어 한반도기를 들고나간다고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마음 한 뜻이란 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같은 복음을 듣고 한 성령이 임하였는데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도 이러한 다툼이 일어나는 정도로 인간의 약함과 악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 곧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면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미 복음의 신앙에 많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초창기부터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에 협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이런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모르겠지만 서로 주의 일을 더 잘하려고 하다가 다툼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교리적인 문제로 다툰 것은 아니기에 서로 한 마음을 품고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본문 28절을 봅니다. 무슨 일이든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도 소동이 일어났고 추방을 받은 것처럼 지금도 대적들은 빌립보 교회를 대적하고 있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적들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기에 27절에서 한 마음으로 서라고 한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선다는 것은 운동이나 전투를 할 때에 서로 결속하여 서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멸망의 증거이며 핍박을 받는 자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2:14~17절입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복음 전하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에 향기로운 꽃과 향수로 환영하는 무리를 보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개선장군에게는 승리의 향기가 되겠지만 패배한 군인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전하면 반드시 이러 반응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한 복음을 듣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맡아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맡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사망의 냄새로 맡아지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믿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향기로 맡아지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복음을 믿는 자들과 연합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 멸망의 증거가 되고 복음으로 핍박을 받는 것은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복음으로 인한 핍박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의 시민 노릇한 것으로 핍박을 받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모두가 땅의 이야기를 할 때에 하늘 이야기를 함으로, 모두가 썩어질 복을 말할 때에 썩지 아니할 복을 말함으로, 모두가 강함을 말할 때에 약함을 말함으로 받는 핍박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핍박 받기를 싫어하여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중심으로 생각을 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일을 은혜로 생각하고 고난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면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오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직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이 오는데 이 고난도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이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따라 성화가 되고,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시면 아주 분명합니다. 믿음도 은혜로 주어지지지만 고난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왜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자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셔서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묵시적으로 죽은 자로 간주하시만 이 역사 속에서 내가 몸으로 사는 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과정에서 육체의 소욕이 꺾어지는 과정이 고난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갈 소망조차 끊어지게 하심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성도의 고난입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그런 싸움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있는 그 싸움이 이미 내 안에서 너희가 본 것이며 이제도 내 안에서 너희가 듣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에 주어지는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의 신앙에 협력함으로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오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크고 유명하다는 교회에서 전해진다는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릅니다. 하나님 잘 섬기면 만사형통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전하니 저에게도 조그마한 핍박이 옵니다. 사도들의 핍박에는 새 발의 피도 안 되지만 작은 핍박이라도 오니 저는 기쁩니다. 그래서 더 담대해 집니다.

 

로마서 8:15~17절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는 것이라고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을 우리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라면 상속자가 됩니다. 이러한 상속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기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난을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1)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베드로와 바울의 출발이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이 이단의 괴수이며 그를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성령이 임하게 되니 이렇게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말하는 내용이나 베드로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말하는 것이 내용면에서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이미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먼저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비 복음적인 것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한다면 얼마나 큰 심판을 받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이란 한 성령을 받았기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나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대적하는 것이 멸망의 증거입니다. 복음으로 핍박을 받는 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고난도 은혜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바울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성도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은혜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은혜라는 말씀은 좋은데 우리에게 고난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이 싫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평안하다고 안전하다고 할 때에 갑자기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여기면 그리스도의 날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하여금 깨어있도록 적절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난이 오면 깨어있도록 하시는 은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입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성도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만 맡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깨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시면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런 환난을 통하여 더욱 주의 날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신다면 땅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조치하시는 주님의 인도가 은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함도 은혜로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