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 동산에서 2017. 10. 1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지난주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죽기까지 부인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스가랴서의 말씀으로 너희가 다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배반하였습니다. 다 실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면서 따라 갔다면 사도됨의 자격이 베드로에게 있기에 자기의 자랑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며 배반한 베드로는 사도로서 목양을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은혜만 전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본이 된다고 합니다. 이번 달 구역교안의 내용이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양의 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구역장 두 분이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본이 되어야 합니까?

 

디모데전서 1:15~17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사도가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주동자가 되었으며 교회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예수 믿는 사람을 외국에까지 가서 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이유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본이 됩니까?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왔다고 하면서 자신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다는 이런 본이 되면 됩니다.

 

오늘 본문 3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가십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 자락에 있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습니다. 이곳은 올리브 나무가 많기에 감람산이라고 합니다. 올리브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감람(橄欖)입니다. 이 산에 올리브를 짜는 곳이 겟세마네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란 기름 짜는 곳입니다. 제자들과 종종 이곳에 오셔서 기도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도 잘 아는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십니다.

 

본문 37~38절입니다. 변화산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왜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고뇌하고 슬퍼하시는가에 대하여 의아해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자꾸만 놓칩니다. 예수님도 배고프시고, 목마르시고, 슬퍼하시고, 분노하시고, 고통을 느끼시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이해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이 계시한 만큼만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아시기에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쓴 잔을 마셔야 하신다고 말씀하셨고 지금 이 잔을 마시기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고민을 하시며 기도하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고통의 한계보다 더한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위하여 장렬하게 죽음의 길로 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옳은 일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의를 이루시는데 이런 고민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39절을 봅니다. 세 명의 제자들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이 완전히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아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간구하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한번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보러 오시니 제자들이 자고 있습니다.

 

40~41절입니다.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깨우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제자들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이렇게 말했지만 한 시간도 깨어 기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가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앞에서 세 번 부인하리는 말씀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42~46절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서는 두 번째 기도를 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에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와 보니 자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고합니다. 이들을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고 오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고 쉬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12:16~18절입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다윗의 아들이 죽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과 같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레 만에 죽었습니다. 다윗이 며칠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는지 모르지만 결국 아이가 죽고 나서 신하들이 아뢰기를 두려워합니다. 아들이 병이 들었을 때에 금식기도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어떨까 염려하였는데 죽고 나니 오히려 기름을 바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리라고 하여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하들이 놀라워할 때에 다윗은 내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쉬라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본문 44~46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기도제목으로 세 번을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세 번 자신의 육체에 박힌 사단의 가시를 세 번이나 빼달라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바울사도는 그 뜻을 알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 번의 기도를 하신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과 바울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이해가 됩니다. 그 쓴 잔을 마시여 한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면서 이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43~44절입니다.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는 장소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올리브를 짜는 곳에서 기도하십니다. 이 이미지도 그리스도의 깨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리브를 짜는 방법은 올리브의 생 열매를 기계로 압착하여 짭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분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미 땀이 핏방울 떨어지듯이 기도하십니다. 자신이 으깨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롬은 이 기도장면을 그리스도의 전수난(前受難)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렇게 죽도록 고민하시며 기도하셨느냐는 질문을 앞에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기에 그 고통의 의미를 피할 수 없는지 기도하셨다고 봐도 됩니다. 이런 모습이 제자들의 눈에는 연약한 모습으로 보일 수가 있기에 실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기도는 대속을 위한 대신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제자들이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을 모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봅니다. 아버지의 품에 있는 외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나타내는 자가 없다(1:18).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에게 주셨다(3:35).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요한복음 10:31절에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10:38, 14:10).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통과 고민은 나를 중심으로 나의 행복을 위한 것들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날아가면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전에 김동근 집사가 교회당에 선풍기 설치하면서 막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장난친다고 숨었습니다. 아버지가 찾아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사색이 되었습니다. 밖에까지 뛰어나갔습니다. 제가 나가보니 기둥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아들 세 명이 있는데 막내가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사색이 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예수님이 안 보인다고 이렇게 놀라고 사색이 되어 찾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관계를 파기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 된 그 영광의 교제가 영원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도 고통이지만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도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아들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장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이 토지소산의 맏물을 십일조로 드리는 뜻입니다. 처음 것이 거룩하게 됨으로 나머지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끊어지는 이 고통을 감당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방식은 자기 자신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버림을 받는가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우리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죄 아래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자신의 몸을 삼아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7:20~26절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에서 최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이루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고 그곳에서 잡히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받음으로 죄로 인하여 버림받은 자와 하나가 되셔서 그 죄를 속하시고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관계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린 그 영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 혼자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하나가 된 자들로 그 창세전의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