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3~24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2017. 4. 9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지난주에 이어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을 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인 십일조는 했을지라도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일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대로 7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왔다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다가 어려움이 닥치자 자기 집을 짓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 성전 지을 때는 멀었다고 하면서 방치하여 두었습니다. 이때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신 내용이 학개서입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과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서 성벽을 완성하는 일은 느헤미야 총독이 합니다.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완성하고 나서 성전의 제사가 제대로 유지되도록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줄 십일조를 내도록 합니다. 그래서 성전의 문지기들과 찬양대까지 유지되도록 해 놓고 잠시 바벨론 왕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제사장이 아는 사람 도비야가 성전의 제물들과 유향과 십일조를 두는 방에 자기 방을 만든 것입니다. 당연히 십일조도 드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계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도비야 방의 세간살이들을 밖으로 내어 던지고 다시 십일조를 채우게 하고 레위 사람들을 제자리에 세웁니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말라기서도 기록이 됩니다.

 

말라기 3:7~10절입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가 너무나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으라고 합니다. 학개서와 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하여 이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제사장의 속죄가 이루어지면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산물을 냅니다. 속죄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전과 제사장과 십일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 십일조의 정신 안에는 땅이 없는 레위인과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봄이 들어가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지난주에 본대로 장자의 희생, 처음 것의 희생으로 나머지가 거룩함을 입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라기서의 말씀을 문자대로 받아서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말라기의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가 하면서 그 뜻을 찾아보니 되로 되거나 말로 될 때에 고두로 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두라는 말은 되나 말로 곡물을 거래할 때에 밀대로 싹 밀어내지 않고 위에까지 가득 차게 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재어보니 온전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 아니라 12.5퍼센트라고 하면서 그렇게 십일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를 위하여 밥을 얻어먹으면 그것을 수첩에 기록합니다. 차를 한전 얻어 마셔도 기록해서 내가 지불하여야 할 돈인데 지불하지 않았기에 수입으로 잡고 십일조를 계산 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두 사람이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입니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받고 싶은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였다면 이것이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이러한 말라기서의 말씀을 통하여서도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이 됩니다. 위의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성도가 말라기의 말씀을 가지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온전한 십일조를 해서 땅의 복을 받으려고 하였다면 이것이 바로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느라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하는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율법의 몇 가지 조문은 남겨두고 다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조문은 다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됩니다(2:10).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으로 의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의 조문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부정한 것을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루살이는 구체적으로 부정한 곤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도 부정한 곤충으로 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부정한 곤충들 곧 날개는 있지만 기어 다니는 것은 부정하기에 그런 곤충이 들어갈까 해서 포도주를 마실 때에 베에 걸러서 마신 것입니다. 낙타는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부정한 짐승입니다(11:4). 그래서 먹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부정하다고 걸러내면서 부정한 낙타는 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철저히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마음은 도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서기관들이기에 보호자가 없는 과부들이 그들에게 재산을 맡기니 삼켜버린 것입니다. 물론 다그렇겠습니까만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으로 자신들의 영광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들의 속은 더 큰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은 제가 들어야 합니다. 저 나름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미자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 새벽 세시에 전화가 왔습니다. 잠을 못 자겠다고 기도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낮에 다시 전화가 와서 새벽에 전화한 것 미안하다고 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목사님께 전화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신 차리고 동생 건사하며 잘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회를 가려고 하는데 동생이 늦게 일어나서 못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 속으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가 행패를 부리면 아무도 감당을 못합니다. 다들 슬슬 피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오는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가 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21~23절입니다.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예루살렘이 이러하였기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십일조를 하였지만 이사야 시대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 오실 때에는 더욱 철저하게 율법의 조문을 지켰지만 그 속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2:38~40절입니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이러한 서기관의 모습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는 표시로 긴 옷을 입고 다니며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경건을 팔아서 도적질 한 것입니다. 의지할 것이 없는 과부가 자신의 재산을 맡아달라고 맡겼는데 꿀꺽 삼켜버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고 과부의 재산은 낙타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3~16절입니다.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결론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재물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런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십일조와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요한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놓치고 그 율법의 조문을 붙들게 되면 결국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시고 결론으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긴다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십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며 그 후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의 결론이 세례요한으로 마감이 됩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메시아가 세례요한을 통하여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성경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그 천국의 복음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복음이 침입하여 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선포되고 믿어지는 일은 오직 주의 영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5: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하고 율법의 조문까지 다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바로 구약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을 한 마디로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함에도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마다 자기의 영광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부인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도 자신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의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모든 율법의 저주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의가 전가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 그 영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는지 알고 믿게 됩니다.

 

로마서 8: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모든 십일조가 처음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장자, 처음 난 것, 가장 귀한 것으로 표현되는 십일조의 드려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처음 익은 열매로 드려진 내용을 바울사도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이되십니다. 그러므로 그 영이 임한 자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곧 부활의 첫 열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성도는 이 땅에서 탄식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골로새서 2:13~19절입니다.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조문을 지킨다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뜻을 버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그 뜻과 의미를 살려서 지킬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우리를 불리하게 하는 그 율법의 조문을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도 안식일도 다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의 요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일입니다. 우리의 십일조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8~17절입니다.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지난주에 본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레위지파가 십일조를 받지만 이들은 죽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는 자가 십일조를 받은 자가 멜기세덱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지파는 아브람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레위지파의 직분이 바뀌어 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사 직분이 바꾸어지면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레위지파의 제사 직분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기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레위지파의 제사가 드려진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필요한 것은 그림자의 역할입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행하는 제사로는 아무것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들도 죄가 있는 자들이며 이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으로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사가 없으니 율법도 그리스도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조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완전하며 영원한지 자신을 믿는 자들은 단번에 영원토록 온전하게 거룩하게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히브리서 10:9~18절입니다.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1)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처음 익은 열매로 드려지는 십일조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율법의 완성만이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의 완성이 됩니다. 자기 자신이 맏아들로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함을 얻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그 완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가 부인되어 지고 예수님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