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1~10 유다의 최후 2017. 10. 29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본문 1~2절을 봅니다. 밤새도록 예수님을 심문하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의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법의 형식을 따라 진행을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밤에는 사형언도를 내릴 수가 없기에 새벽 곧 이른 아침에 사형을 결정하고 빌라도에게로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신성모독에 관한 것이라면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할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이런 것도 계산하여 빌라도에게 사형을 언도하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유다의 이런 고백이 베드로와 비교하면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자 닭이 울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돌이켜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눈길을 보고서도 제사장의 뜰을 벗어나서 통곡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스스로 뉘우치고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더 양심적입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정죄 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친 것입니다. 스스로 뉘우치면서 자신이 받은 돈을 돌려주면서 자신이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돈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받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네가 당하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라면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을 하면 속죄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 속죄의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메어 죽는 일을 제사장들이 방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뉘우쳐서 성전에 예수님을 판 돈을 도로 가져갔지만 제사장들이 받지 않은 것도 스스로 한 것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라는 말은 우리 피조물인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신이 우리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가 팔리는 참새(10:29),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 팔리는 참새(12:6)입니다. 한 앗사리운에 두 마리인데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라면 한 마리는 덤입니다. 이렇게 덤으로 팔리는 참새조차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조차 하나님께서 헤아리신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11:36).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가룟 유다가 더 양심적입니다. 자신이 삼년 동안 따라다닌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 너무나 양심이 가책이 되어 스스로 뉘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자신이 죄를 지었기에 대제사장에게 은 삼십을 도로 들고 갔지만 제사장들이 받지를 않고 네가 담당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놓고서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었습니다. 스스로 뉘우친 결과가 스스로 목메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스로가 과연 유다의 스스로 일까요?

국어사전에 스스로라는 부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남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결심하여’ ‘다른 것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저절로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자연(自然)이라는 말도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자아(自我)라는 말도 스스로 나라는 말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을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한 말이라고 합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 홀로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존귀한 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사람이 부처가 됩니다. 그래서 휴암 스님과 같은 분은 기독교는 철저하게 타력구원이고 불교는 철저하게 자력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자력구원과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가지 악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같습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가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결국은 말라죽을 뿐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야 삽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생존이든 생명이든 그 최후는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6:70~71절입니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자 임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신다면 우리의 스스로가 무너진 자들입니다. 자아라는 주체가 무너져야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하고서도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스스로 뉘우치고 예수님 판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서 스스로는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스스로는 스스로 계신 분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는 이 단어를 우리가 여호와로 부릅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발음할 수 없는 거룩한 네 문자입니다. 이러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 역입니다. 이 번역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단어를 헬라어의 에고 에이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아들이 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6~8절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 값이라고 하여 성전의 돈궤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 돈이 무죄한 자의 피 값임을 제사장들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의논한 후에 이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은 것입니다. 이런 돈을 성전의 거룩한 일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사회복지사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밭 이름을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16~20절입니다.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4)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5)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기 위하여 모였을 때에 한 말입니다. 유다가 직분을 잃어버리는 것도 시편의 예언대로 되었다고 합니다(69:25,109:8). 괄호부분을 보면 유다의 최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괄호부분은 어떤 사본에는 없고 어떤 사본에는 있다는 표시입니다. 불의의 삯으로 밭을 샀다는 것은 가룟 유다가 산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은 삼십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돈이기에 불의 삯으로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기에 이 밭을 피밭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9~10절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가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돈을 성소에 던졌는데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것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 삼십의 이야기는 스가랴서의 말씀이지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또 망하는 예루살렘의 밭을 사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들이 함께 나오기에 예레미야의 말로 언급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토기장이의 이야기와 은 삼십에 관한 내용을 봅니다.

 

예레미야 18:1~6절입니다. 봉독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다음에 나옵니다. 7~11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을 보면 인간의 실상이 보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이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돌이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물론 깨드리심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돌아오시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9: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1)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예루살렘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힌놈의 골짜기로 갑니다. 이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곳에서 옹기를 깨뜨려 버립니다. 이곳은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번제로 불살라 드린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않고 죽임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우상숭배만이 아니라 4절을 보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곳입니다. 예레미야보다 앞선 시대에 요시아 왕이 개혁을 하면서 이곳을 쓰레기 태우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쓰레기 태워지는 연기로 인하여 이곳의 이름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게헨나로 바뀌어 지옥의 대명사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토기장이의 밭을 피 밭이라고 하는 말에 이런 의미들이 있습니다.

 

스가랴 11:12~13절입니다.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가룟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성전에 던지니 제사장들이 의논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제사장들의 이야기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미 예레미야나 스가랴의 내용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11:4~11절을 보면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고 합니다. 지금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 백성들을 사고팔고 있습니다. 양을 사서 잡는 자들은 죄가 없다고 합니다. 판자들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목자들이 그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새로운 목자를 세웠지만 그 목자를 양들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잡혀 죽을 가련한 양떼를 먹이는데도 그 양들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목자를 원하지 않음으로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래서 연합이라는 막대기와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 버리니 양들이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라는 자들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있었지만 양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자들을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셔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9:36, 6:34).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썩을 양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시자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따라간다고 한 제자들조차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습니다.

 

스가랴 11:12~1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님께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리스도 영에 의하여 내 품삯을 주려면 주고 말려면 말라고 하였더니 은 삼십 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받은 돈과 같은 것입니다. 노예의 몸값입니다. 이 돈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기에 스가랴는 토기장이에게 던졌다고 한 이 말씀이 가룟 유다가 받은 돈을 성전에 던지니 그 돈으로 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무덤으로 삼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한 것이나 제사장들이 이렇게 한 것이 스스로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히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한 사람이라면 세상만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만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언약을 인하여 만들어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세상살이이며 종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인도되는 삶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속담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는 돕는다는 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 성공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 복음적인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이 속담을 마치 성경말씀처럼 직접 인용하는 경우도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냐고 반문하실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 것도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나의 뜻을 관철하여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가 둘 다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에 배신한 후에도 주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가 주께 버림받는 자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전적인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계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은혜로 받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의 고백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고전15:10). 이런 자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에 거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