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4~5 기쁨과 관용 2018. 6. 10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본문 4절을 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은 이렇습니다.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기뻐하면서 살았습니까? 짜증을 부리며 살았습니까? 아마 대부분이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짜증을 부리고 원망을 하고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기에 화가 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이루기 위하여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면 좀 더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죄로 인한 것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힘을 가지려고 나서보니 이미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찾습니다. 능력이 많은 신에게 정성을 바침으로 신의 힘을 빌려서 내 뜻을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뜻을 무너뜨리고 주님의 뜻을 우리 안에 이루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재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11:36). 그렇다면 우리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일에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만사가 주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이 어떠하여도,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어도 주님의 뜻대로 되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외부의 핍박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고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는 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가장 가까운 구절은 지난주에 본 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으며 그 복음에 협력하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이 어떠하여도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3:20,21). 비록 지금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다툼이 있을지라도 주 안에 있다면 이러한 약속을 받았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사형에 처해 질지도 모르지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를 봅니다.

 

빌립보서 1:3~5절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듣고 처음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에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합니다. 옥에 갇혀 있지만 감사와 기쁨이 끊어지지가 않는 이유가 복음 때문입니다.

 

1:1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이미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이지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내용이 무엇인지 몇 곳에서 다시 살펴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니 다른 사람들이 바울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옥에 갇힌 것이라고 하면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가 전파됨으로 바울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2: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바울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사적인 기쁨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권면하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성도 안에서 권면, 사랑, 위로, 교제, 긍휼, 자비가 있을 때에도 인간의 약함과 악함으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날 수 있기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예수님을 믿는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6:40).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6:29) 영원한 생명입니다(17:3).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2:17~18절입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립보 교회의 복음에 대한 헌신을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 위에 자신을 부어드리는 제사처럼 될지라도 기뻐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성령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2:28~29절입니다.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에바브라고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이 염려하고 있기에 에바브로가 병이 나은 것을 알게 하려고 먼저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에바브로를 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는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도 돌보지 않은 자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내용들이 이러합니다.

 

3:1절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여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비록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여러 가지 박해들이 있지만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핍박조차도 주 안에 있는 이 기쁨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환경이나 조건이나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입니다.

 

사도행전 5: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서 사도들에게 어찌해야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복음이 증거 되자 산헤드린 공회에서 제자들을 잡아서 위협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담대하게 우리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핍박 받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7절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복음이 증거 된 것은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적과 기적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증거 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환난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 중에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4:17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하나님의 나라는 음식의 정결규례를 지키고 아니 지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주 안에 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의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진 의가 됩니다.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로 평강을 누리는 것이 참된 기쁨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았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합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수치를 스스로 가리려고 합니다.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일들이 타락한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의 가죽 옷을 입혀주십니다.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십니다. 씨와 땅을 약속 하시고 열방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복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출애굽 합니다. 출애굽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처소를 삼으시고 그곳에서 영원 무궁히 거하시는 것입니다(15:17,18).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만들게 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언약을 맺었지만 광야에서도, 가나안 땅에서도 늘 언약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시기에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하신 백성을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처소를 만들러 가신다고 하십니다. 이 처소란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면 그 성령이 임한 자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그 완성을 하나님과 어린양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사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소를 은혜로 받은 자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소유를 늘리는 기쁨이 아니라 나누는 기쁨을 누립니다. 내가 높아지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기쁨을 누립니다. 자발적인 고난의 길을 기쁨을 갈 수 있는 자들이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길을 가셨고 그의 사도들이 이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쁨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도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관용을 나타냅니다. 그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만 하지 않고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관용(寬容)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베푼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성과를 나타내야 합니다. 성과를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관용을 하면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관용 없이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게 스트레스입니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위하여 쾌락으로 보상하려고 합니다. 이런 악순환의 구조에서 관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관용은 주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아는 성도들에게서 나옵니다.

 

로마서 13: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습니다. 즉 주의 재림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창시지이시며 믿음의 완성 자이신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 곧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기쁨을 위하여 그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자리에 예수님 홀로 앉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도 다 함께 하늘의 보좌에 앉히신 것입니다(1,2).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이 사실을 이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이루고 계시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으며 관용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농촌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 오면 농촌에 살던 모든 기구들이 쓸모가 없기에 다 나누어 주고 옵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의 임함이 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가까워졌음을 성령을 통하여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관용을 베풀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 볼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