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14~23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2019. 3. 24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1절부터 23절은 한 단락인데 오늘이 그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멀다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을 계명을 버린다고 합니다. 이어서 고르반 사상도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의 전통과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겉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마음은 하나님께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사람의 전통과 가르침에 대하여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전통과 가르침은 우리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곧 교묘하게 성경을 푼다는 것입니다(벧후3:16).

 

우리도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습니다. 몇 대를 이어서 어머니의 뱃속부터 다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분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래 다닐수록 하나님과 멀어집니까? 가까워집니까?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말고 정말로 마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면 서로 알기를 원합니다. 취미가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려고 합니다. 그렇게 알아가면서 서로 더 깊이 알려고 하고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면 마음으로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이 없어진다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사이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4~16절입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서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화가 나서 가버린 모양입니다. 이들은 그냥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의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무리를 모으시고 그들에게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합니다. 듣고 깨달으라는 내용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 17~19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떠나가고, 무리들이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를 묻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을 제자들도 못 알아듣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손에 무언가 부정한 것에 접촉한 적이 있으면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손을 씻어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니 제자들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로 들어가 소화되어 배설되는 것이기에 그런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장로들의 전통보다 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심을 이런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한 것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을 구별한 내용입니다.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가 곤충 중에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나눈 것입니다. 먹을 것은 주로 초식동물로 되새김질 하고 굽이 갈라진 것입니다. 먹지 못할 것은 사나운 짐승이나 새, 주검을 먹는 것, 땅에 들어붙어 사는 것들을 부정하다고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은 땅에 들어붙어 사는 것은 다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율법과 전통을 따라 엄격하게 음식을 구별하여 먹고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니 제자들도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본문 20~23절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속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악한 생각이 뿌리요 나무라면 그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열매들이 열두 가지입니다. 앞의 여섯 가지는 복수로 말하고 뒤의 여섯 가지는 단수로 말하는데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한 생각으로 나오는 것들이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입니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12가지 항목에서 나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분이 계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음란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이입니다. 포르노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온통 음란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포르노적인 것만 음란이 아닙니다. 교회를 신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도 음란이며, 간음이며, 음탕한 것입니다. 성적인 표현들이 세 개나 나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둑질은 만사가 다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니 강도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니 살인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입니다. 악독하고 속이며 질투하고 비방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것도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창세기 6: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장은 창세기 3장 이후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인간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이후에 보았다는 것의 실상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고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어야 하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가려야 하는 모습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

 

세상만사를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이 상태가 바로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모든 것들이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지만 이것을 죄로 인식도 못합니다. 이것이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모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물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시기에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로 방주를 예비합니다. 방주가 완성이 되고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인간의 모습이 달라졌을까요?

 

창세기 8: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노아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내린 노아가 여호와께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사람으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면 날마다 심판을 해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5절과 연결하면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합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그 어떤 것들이 나와도 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아담 시대의 사람들이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알았을까요? 자신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런 세상에도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와 같은 자들은 은혜를 입었기에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롱을 당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니 방주를 그렇게 오랫동안 만들었지만 노아 가족 외에 한 사람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죄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그들은 계속하여 죽어갔습니다.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것입니다.

 

로마서 5:12~14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있고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율법이 없었기에 죄를 죄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들에게 율법을 주면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까? 겉으로는 거룩한 모양을 내지만 속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이스라엘 백성들에 율법을 주었지만 맹인이 지도를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내용을 알아 볼 수가 없어서 겉모습만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결과로 죄만 더하여졌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속이 더러운 것입니다.

 

이어지는 3~8절입니다.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이렇게 된 것은 마음이 악하기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악한 자가 선을 행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지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흑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표범이 그 얼룩반점을 스스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런 계시를 전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여 내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율법으로 언약을 체결하였지만 그들은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아내가 되는 율법의 언약으로는 온전한 결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데 새 언약은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 새 언약을 이루시면 여호와를 알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새 언약을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기에 성령이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죄를 용서 받고 그 죄를 기억도 안하십니다.

 

누가복음 22: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구약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시는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을 최후만찬의 자리에게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란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

 

히브리서 10: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여기서 마음의 뿌림이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8장부터 새 언약에 대하여 계속말씀하신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악한 양심에서 벗어납니다. 이런 자들은 에스겔 36장의 말씀처럼 씻음을 받아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죄 임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