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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8~10 선한 일을 위하여(1) 2012. 10. 7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왜 전적인 선물로만 주어집니까? 이유는 이미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반복하여 봅니다. 에베소서 2:2~3절입니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모든 아담의 후손의 상태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자꾸 반복해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9절을 봅니다. “봉독” 같은 말을 하는 쓰는 이유는 개들을 삼가게 하기 위하여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개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육체를 자랑할 것 같으면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더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 모든 자랑거리들을 이제는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말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난 의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은혜로 살려주신 이유를 에베소서 2:7절에서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바울사도 자신의 예를 들어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 자비와 긍휼을 따라 앞으로 구원 얻을 자들의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딤전1:15).

 

오늘 전할 말씀은 2:10절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지금까지 오면서 구원의 은혜를 마무리하면서 핵심적인 결론의 말씀이 2:8~9절입니다. 이것을 두 주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지난주에 결석을 하신 분들은 설교원고를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은혜로 구원하셨는데 우리들은 모이면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들로 자랑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어떤 분이 이번 추석에 실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을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7절에서 은혜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하시는 것은 천지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천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여기서 만드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왜 만드신 것입니까?

 

에베소서 2:10절을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사람들도 다들 선과 악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이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악입니다. 유익과 손해라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나의 명예와 자존심의 문제도 다 포함되는 손해와 이익입니다. 이런 선과 악의 기준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기존의 나 있음을 절대 진리로 보기에 나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결정하고 삽니다. 이것을 확대시키면 내가 속한 가정이며, 내가 속한 회사이며, 내가 속한 국가이며, 내가 속한 교회입니다.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선악과를 따 먹은 죄로 인하여 모든 선악의 결정을 인간이 하게 된 증거입니다.

 

이 모든 선악의 기준과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표현하는 한문의 아(我)자는 두 글자가 합하여져 있습니다. 손 수(手)변과 창 과(戈)자입니다. 사람의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안에 거하여야 하는 인생이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독립하여 나선 인간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창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떠난 인생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23~24절입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이 후손인 라멕의 말입니다. 가인이 성을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여야 합니다. 이런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문명이 발달합니다. 악기를 만들고 쇠로 기구들을 만듭니다. 그 기구는 무기도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라멕이 어느 소년에게서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로 인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인데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합니다. 나를 건드리면 다 죽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생의 진리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떠난 인생들의 악함이 이런 선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악이기에 인간이 합의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악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good things’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서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천지창조를 하셨을 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선하였더라는 말씀입니다. 좋았더라는 말이 영어로 ‘good’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의 손길이 전혀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 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다 선한 것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합니다.

 

출애굽기 33:18~19절입니다.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한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선한 것이란 영어로 ‘All right’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선하고 옳으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그 옳으심과 선함이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엿장수가 1분에 가위질을 몇 번을 하는지는 엿장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결정에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 인간에게는 은혜의 선물로 구원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서울 서머나 교회에서 설교를 마치니 어떤 여자 분이 서머나 교회에 처음 왔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설교를 다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인간이 선한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을 하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이방인은 양심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그 양심을 따라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구원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2장의 말씀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는데 서로 송사하고 변호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지 이방인이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양심고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악한지 은혜를 이야기하면 은혜를 이용하기 바쁜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만 이야기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헌신과 봉사가 약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은혜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로 살아온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일이 선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선한 일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경우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있고 자기 의로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과 본인만 알겠지만 대략적인 구별은 은혜로 된 것은 감사로 나올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나온 것은 자랑으로 나올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라고 합니다(고전15:10). 이것이 바로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란 에베소서 2: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윤리나 도덕적인 사람일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든 일입니다. 평생 착하게 산 사람이 평생 강도짓을 한 사람과 비교하면 누가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지옥가야 하고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천국 간다고 하면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하루에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일한 사람에게 같은 일당을 주는 것에 누가 분노하겠습니까?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 분노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악개념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면 꼭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열심히 하지 않겠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 심지어 일부러 악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드러나지 않겠느냐고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로마서 6:1~2절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오해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전해야 합니다. 선한 분은 한 분이시고 또 선한 일이란 인간으로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9:16~21절을 봅니다. “봉독” 평행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17절입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부를 말씀하십니다. 이 청년이 다 지켰다고 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영생의 길임에도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섰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일이며 이것이 영생의 일입니다. 그러나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일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에 들어가는 것임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요6:26~29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