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14~29 산 아래서 2019. 5. 26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산 위에서 일어난 내용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따로 산 위로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하늘로서 음성이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위의 일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치 모세 때에 산위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모습과 같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본 것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그 능력으로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면 되실 텐데 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지 제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산위에서 방금 본 그 영광의 주님이 죽으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의 메시아사상은 죽는 메시아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까지 보았는데도 자꾸 죽음을 말씀하시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산 아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 14~16절입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갑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큰 무리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간질 든 아이를 어떤 아버지가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3:15, 6:13).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 위로 올라가신 후에는 못 고치는 것입니다. 이때에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더불어 변론을 합니다. 서기관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전통과 사람의 가르침으로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자 놀라며 달려와 문안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고 묻습니다.

 

17~18절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을 합니다. 이 한 사람은 병이 든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내 아들이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 증세는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병을 고쳐준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전에는 분명히 고친 적이 있지만 지금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는 동안에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아이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병을 고쳐주는 경험을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제자들은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고 얼마나 참아주어야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만 믿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인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백번 설교 듣는 것보다 기도원에 데리고 가서 방언 받게 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미국의 교회견학이 유행하였습니다. 미국의 큰 교회당들 보여주어서 우리도 저렇게 하자는 동기를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언가 체험하게 하고 보이게 하면 사람들이 열심히 합니다. 이런 모습은 보고 믿는 것이기에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가 땅에 엎드려져 구르며 거품을 흘립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오심이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인 줄 압니다(1:24, 3:34, 요일3:8). 그러니 그 아이를 더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증세가 있으면 귀신 들린 자로 보지만 아주 교양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귀신 들리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이 세상의 신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또 모든 질병을 귀신의 일로 보는 것도 귀신에게 속은 겁니다.

 

21~2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병을 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을 보고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 달라고 합니다.

 

23절입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할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게 무슨 말이냐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 할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조금 전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그 예수님이심을 산 아래에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미리 영광을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시는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미리 계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 없음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말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잘 못 사용되었는지 예를 들자면 몇날 며칠을 말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건물들이나 단체나 간에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 늘 하는 말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 만능주의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쏟아지는 것처럼 믿음을 그렇게 가져다 부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는 자란 누구입니까?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도 당연 믿음이 없습니다. 병든 아이는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무리도 믿음은 없습니다. 누구의 믿음입니까?

 

마태복음 17:17~20절입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늘 본문과 같이 산에서 내려온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책망 후에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제자들이 따로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예수님께 물으니 예수님의 답변이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겨자씨 한 알 만큼만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못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이 믿음만능주의로 사용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치고, 부자도 되고, 교회 부흥도 하고, 남북통일도 되고,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누가 들어있어야 합니까? 자기가 있습니다. 나를 빼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믿음 없음의 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누구의 믿음이며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 믿음은 분명히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산 아래는 믿음이 없는 동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금송아지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모습이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로 다 이루심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걸어놓고서 그 안에서는 금송아지를 숭배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그 말씀을 들은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은 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임이 예수님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나옵니다만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나는 믿음이 하나도 없는 자임이 늘 드러납니다. 이럴 때에 하는 말이 주여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입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많은 무리가 달려와 모여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일어섰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그 믿음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28~29절입니다. 이 치유사건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니 제자들이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본문의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음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나 기도가 이렇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나 오늘 본문을 가지고 믿음 만능주의’, ‘기도 만능주의로 나가는 것이 종교성입니다. 믿음과 기도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추구하는 내용이 세상 사람들도 놀랄만한 세상의 업적들이라면 결코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을 추구한다면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만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4:13~15절입니다.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믿음은(2:8) 이 고백을 합니다.

 

이어지는 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성령이 임한 자들의 믿음은 세상의 보이는 것과 썩어질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내용입니다. 이런 것은 산 아래서 혈육이 결코 만들어 낼 수가 없기에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그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안고 하늘에 올리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믿음의 일들입니다(1:20, 2:5,6, 4:8,9). 이런 믿음은 그의 은혜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기에 누구도 자기의 믿음을 자랑 할 수가 없고 예수님만 자랑합니다(2:8,9).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곳과 저곳 멀잖다 주 예수 건너 오셔서 내 손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소원이로다. 찬송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