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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11~13 그때와 이제 2012. 10. 21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가는 이 길이 바른 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영원히 이 땅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넓은 문 넓은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가는 길은 넓은 문 넓은 길이지만 그러나 그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지만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이 멸망의 길인지 생명의 길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라고 하는 말씀은 그때와 이제를 비교하면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는 그때와 이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때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들을 세상에서도 많이 합니다. 흔히 미꾸라지 용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전에는 미미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세상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학생은 성적이 그때보다 지금 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직장인은 수입이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회사는 더 규모가 커지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어제보다 오늘 더 부흥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전혀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나아진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한 능력으로 행하신 일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일을 행하신 결과로 그때와 지금이 구별되어진 것을 말씀합니다. 에베소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기 전에 먼저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는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15절에 보겠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다고 하느냐” 물론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갇혔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16절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하여 아침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이라면 오전 6시입니다. 이때 일하기 위하여 나와 있는 품꾼을 발견하고는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일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품꾼이란 일용노동자와 같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날 일하지 못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도 굶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할 수 있고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주인이 오전 아홉시에 나가보니 역시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금액을 정하지는 않고 상당히 준다고 하였습니다. 12시와 오후 3시와 오후 5시까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은 한 시간 일을 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주인이 청지기를 통하여 품삯을 줍니다. 제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삯을 주는데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이때 먼저 온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받을 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똑 같이 줍니다.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주인을 원망하며 어떻게 이렇게 대우하느냐고 합니다.

 

이때 주인이 원망한 사람에게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너에게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기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은 내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제일 나중에 온 사람은 죽도록 일하였다고 합니다. 12시간 일한 것이나 한 시간 일한 것이 같을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12시간 일한 사람은 빈둥거리며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일찍 온 사람이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이 아직 그때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때에 속한 자들이 이제에 들어오게 되면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게 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그때에 속한 자라면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제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선하신 일을 이루어내고야 마십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한 것이 죄임을 알고 이제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시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비록 자신이 징계를 당하고 환난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일을 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봅니다. 그때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육체로 이방인이라고 하는 말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가장 중요한 구분을 할례로 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태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자랑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은 할례의 뜻을 모르고 그저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이스마엘을 낳고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 태어난 자식입니다. 사라의 경수가 완전히 끊어지고 태어난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능력임을 보여줍니다. 그르므로 할례를 받은 것은 전혀 육체적인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보면 이방인들은 이런 할례의 언약에서조차 제외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그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구약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전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나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기다린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갇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조차 없었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그때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고 합니다. 약속의 언약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민족을 이루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내십니다. 이런 약속에 이방인들은 외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그때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합니다. 소망이 없다는 말고 하나님이 없는 자라는 말을 함께 사용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이 과연 소망이 없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망들이 다 썩어질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시 잠간 후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 눈에 보이는 소망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때에 속한 사람입니다.

 

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인지는 전도서를 통하여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 사람들이 해보고 싶어 하는 것을 다 해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해볼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라고는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헛되지 아니한 유일한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소망이 없이 살았다는 말이 썩어질 것만 추구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때와 지금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과 지금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전에는 절에 다니다가 지금은 교회당에 다니는 것이 달라졌습니까? 그러나 절에서 빌던 소원과 교회에서 비는 소원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계속하여 복음이 전하여져야 합니다. 교회당에 나오는 것으로 이제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야 다 모르지만 그 사람의 삶의 가치와 목표가 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때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제에 속한 사람입니까? 13절을 봅니다.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그때와 이제가 어떻게 구별이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이냐 그리스도 예수 밖이냐 하는 것으로 구별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들이 다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이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때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는 그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 옳다고 따라간 자들입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자들이었는데 어떻게 이제가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일이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 만이 그때에서 이제로 넘겨주시는 공로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의 공로가 아닙니다. 자기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 모든 그때의 자리에서 이제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아멘이라고 응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