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1~6 예수님을 아십니까? 2019. 1. 20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1)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지난 목요일 경상여전도회 순회예배가 우리 교회당에서 있었습니다. 목사님들도 몇 분이 함께 오십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목사님은 한 분 뿐이었습니다. 왜 목사님들이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자기도 늘 설교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설교 안 들어도 성경을 잘 안다는 생각이기에 듣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노회에서 설교할 때에 목사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안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님을 아십니까?’입니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은 저를 아십니까? 아마 아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얼마나 아십니까? 저와 같이 있은 지 오래된 사람이면 저를 더 잘 알까요? 한 교회에서 20년 정도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잘 알까요? 가족은 저를 알까요? 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제가 여러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게 정말로 아는 게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를 아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마가가 전하는 복음을 읽거나 들은 사람들은 마가가 완전히 거짓말쟁이로 알려져 있다면 마가가 전한 복음도 거짓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란 그 당시에 세상을 변혁시키는 기쁜 소식으로 통용된 단어입니다. 그런 기쁜 소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걸려 넘어집니다.

 

지난주에 마가복음에 대한 새로운 책을 하나 보았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마르코복음서 읽기라는 책입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인데 그 중에 마가의 기록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마가의 별명이 손가락이 짧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손가락이 짧았는지 아니면 마가복음의 문장들이 짧고 간결하여 붙여진 별명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제가 종종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길든지 짧든지, 굵든지 가늘든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예수님을 가리키면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베들레헴이지만 헤롯이 죽이려고 하였기에 천사들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피난 가셨다가 헤롯이 죽고 돌아와서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이런 것도 다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가 삼십 세쯤 되었습니다(3:23).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나사렛에서 삼십 세가 되도록 사셨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잘 안다고 여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여러 곳으로 다니셨기에 이미 고향에도 소문이 났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의 성인남자라면 회당장이 지목하는 사람이 나와서 성경을 읽고 잠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회당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기는 하였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손으로 행한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1)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행하신 일에 놀라기는 하였지만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합니다. 고대 사본에는 목수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는 사본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남자의 아들로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렇게 말한 것은 경멸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미 죽었기에 마리아의 아들이라고도 한 것으로 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들이 야고보 요셉 유다와 시몬과 그의 누이들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고향 사람들이 모르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여자의 이름이 네 번 나옵니다.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다말, 기생 라합,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세 명의 여자들 이름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특히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고 임신을 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그것을 믿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인들의 이름이 족보에 기록됨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각주 1)을 봅니다. 예수를 배척하였다는 말이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실족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칸달리조입니다. 영어로 스캔들입니다. 성경에서 실족하다, 넘어지다, 배척하다, 걸림이 되다, 범죄 하다, 거리끼다 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잘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지켜 봐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잡으려고 온 것을 보았습니다(3). 그러므로 예수님을 혈과 육으로 보고서 안다고 한 것이 정말 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한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자신에게 질문을 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까?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 죽어갈 뿐입니다(8: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17:3, 6:29).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19:30). 유대인들에게는 저주받아 죽은 죽음인 십자가, 이방인들에게는 로마를 반역하다가 죽은 십자가, 그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에서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들리면 영생을 주실 것(3:14,15)과 자신을 아는 참된 지식을 주실 것(8:28)과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12:32)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을 안다고 합니다. 마치 고향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것인데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단에 빠져서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바치는 자들도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여기기에 그렇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확신 외에는 어떤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다른 말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지금까지 믿는다고 지켜온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오신 어떤 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삼십년을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그것이 옳다고 여겼는데 복음을 듣고 보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제 알고 믿겠다고 하는 이것도 나중에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오늘 여기에 이렇게 모였는지 늘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하나의 때 묻은 손가락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의 어떠함보다는 십자가에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기에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6절을 봅니다. 봉독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아가신 것은 그곳에도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기적을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 장면들을 보면 늘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지난주의 말씀도 그 여인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아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잘 아는 고향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향에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안수하여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적은 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보여주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표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환호할만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이런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지난여름에 수박을 보내신 분이 경기도 모임에서 페이버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저자가 하형록씨인데 이분의 부모님은 부산의 용호동 나환자 마을에서 13년을 목회하셨습니다. 그 후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주인공이 승승장구할 때에 심장병이 왔습니다. 심장이식을 해야 하는데 5개월을 기다려 알맞은 심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옆 병실에 사고로 온 사람이 심장이식을 하지 못하면 이틀 후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식받을 심장이 그 사람에게도 맞는다는 말을 듣고서 자신은 일주일에서 한 달은 버틸 수 있기에 심장이식을 양보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기적처럼 일어난 일들을 간증했습니다. 두 번의 심장이식 수술과 사업의 성공들을 간증한 책입니다. 물론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좋게 봐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들이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인공이 그런 호의를 베푼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좋게 보시고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죽어갔다면 그것이 간증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기에 거리끼고 미련한 그 십자가의 죽으심의 뜻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약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온갖 주해와 원어분석과 설교를 하였지만 누가 나는 예수님을 완전히 다 안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2천년 동안 성경의 예수님을 이렇게 저렇게 전하였지만 그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짧은 손가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21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의 각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는 말이 이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자를 이끌겠다고 하신 것이 바울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 이끄시는 사랑이 복음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죽은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믿게 됩니다(11:36). 이런 자들은 세상이나 사람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겉으로 보면 고향 사람들이나 바울처럼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 핵심은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우리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의들을 다 가짜로 드러내시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내가 독립적인 의를 세운 것은 다 쓰레기며 배설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