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31~37 에바다(열리라!) 2019. 4. 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람과 사람이 말을 하는데 답답한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답답하고, 내 말을 그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답답합니다. 이것은 귀가 어둡고 말을 잘 못하여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귀가 밝아서 남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 하지만 말하는 방향이 다를 때는 답답합니다. 같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대화가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을 대상화하여 놓고 나의 정성을 바쳐서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종교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종교성을 다 무너뜨리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의 가장 큰 기반인 성전을 부수어버리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신 분이십니다. 자기 자신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영이 임한 사람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1:1~3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사도들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 복음을 기록하여 두는 것은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사도들과의 사귐이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입니다. 이런 사귐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사귀려면 말이 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눈으로 보듯이 손으로 만져지듯이 하는 사귐이 있습니까?

 

본문 3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서 나오십니다. 두로 지방은 지난주에 본 대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곳입니다.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그 고백을 받으시고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로에서 나와서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오셨습니다.

 

32~37절입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십니다. 데리고 온 사람들과 제자들은 따라갔겠지요! 예수님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합니다. 에바다는 아람어인데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경고할수록 더욱 널리 전파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면서 못 듣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였으니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일으키시고 여러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말씀만 하심으로 고쳐주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그 딸을 보지도 않고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자는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의 양 귀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으신데 왜 이런 방식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는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죄와 사망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죄와 사망아래 있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차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의 인생들은 다 생명의 말씀에 귀가 먹었습니다. 생명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에 새롭게 창조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8:23절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시는데 그 눈에 침을 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침을 약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벌레에 물리거나 가려우면 침을 발랐습니다. 동의보감에서 침은 소화를 돕고 종양을 없애고 눈을 밝게 한다고 나와 있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이빨을 부딪치고 침을 삼키라고 합니다. 현대의학에서도 침의 여러 성분들이 소화와 방부역할을 하는 효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침이 치료효과가 있기에 그렇게 침을 발라서 치료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성경에서 침 뱉음에 대한 내용을 봅시다.

 

레위기 15:8절을 봅니다.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부정한 자가 침을 뱉으면 당연히 부정합니다. 신명기 25:9절을 보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합니다. 욥기 17:6절과 30:10절을 보면 까닭모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욥의 친구들이 네가 죄로 인하여 이렇게 고난을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들이 자신에게 침 뱉는 행위가 같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침 뱉음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함, 조롱, 수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조롱과 치욕의 침 뱉음을 당하십니다.

 

마태복음 26:67절입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창조주가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구속주가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귀가 막혀 있고 눈이 막혀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롭게 창조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쳐주시는 모습이 처음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귀를 만드시고 입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9:5~7절입니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에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이들이 귀머거리이며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뜨게 하시는 일을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이 모습도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는 창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9:35~41절입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2)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라는 분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하여 준 것을 알지만 아직 예수님을 만나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소환되었다가 예수라는 분을 증거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합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자기 칭호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보좌에 계신이가 인자 같은 이로 등장합니다. 그 인자의 형상으로 계신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된 그 자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흙에 침을 뱉어 이겨서 눈에 바르고 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 뜬 자에게 네가 그를 보았고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라고 하시는 말씀에 이 사람이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린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과 함께 예수님의 침 뱉어서 고치신 세 번의 사건을 보면서 그 공통점은 처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후로는 영적으로 귀 먹고 눈이 먼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죄인 됨을 알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다 지켜서 의롭다고 여긴 자들이 율법의 선생이 되어 가르치니 이들이 맹인입니다.

 

요한복음 9:39~41절입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자신들은 본다고 하는 자들에게 맹인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맹인인가 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본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귀머거리이며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당신은 귀머거리며 소경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눈을 뜨고 귀를 열어주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사야 29:9~10절입니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마가복음 7:1~23절에서 사람의 전통과 가르침과 사람을 더럽게 하는 내용을 보면서 이 본문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경외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모두가 소경이며 귀머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맹인이라서 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라고 하는 자들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이사야 29:15~17절을 보면 자기 심중의 계획을 여호와께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우리의 속마음을 알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음을 받은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그에게 지혜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 29:18~19절입니다. “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예수님께서 구약의 이런 예언들을 다 성취하고 계십니다. 자신들이 본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날 때부터 소경되고,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운 자를 고쳐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이들이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35:4~6절입니다.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그 때란 여호와의 구원이 나타나는 때를 말합니다. 구원이 일어나기 전에는 광야의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일어나면 맹인의 눈이 밝아지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자가 뛰게 됩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릅니다. 메시아가 와서 이루실 구원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정말로 영적인 것에 눈에 뜨여졌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성경의 말씀이 사실로 믿어지십니까? 강원도의 산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다 불에 살라진다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 말씀을 믿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교회당을 들락거려도 귀가 먹었고 눈이 감겨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부활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셔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성경이 증거 하는 이 복음이 들리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가려진 자들은 망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망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을 다닌다고 하여도 세상의 영광만 보이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까? 결코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떤 모양이었습니까?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기에 사람들에게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가난한 집안에서 사신 것입니다. 흠모할 만한 세상적인 아름다운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귀가 열리고 눈이 뜨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세상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33~35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혀를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고침을 받으면 썩을 것이 아닌 생명의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감추어진 그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16~18절입니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주의 영이 임하면 세상의 없어질 영광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영원한 영광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삽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