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2~14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2019. 9. 1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지난주의 말씀은 예수님은 나귀새끼 타시고 성전에 입성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호산나를 부릅니다.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찬송하는 이유는 지금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여 달라는 찬송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일을 이룬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다 차지한 왕입니다. 예수님께 그런 왕국을 이루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귀새끼 타고 오신 분은 전쟁의 무기를 없애버리고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무력시위를 하시지 않으시고 성전을 둘러보신 후 베다니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 입성 그 이튿날 베다니 마을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습니다.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화가 열매를 맺을 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는 유월절에 잎이 피고, 두어 달 지나서 열매를 맺고, 한 달 정도 지나서 열매가 익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마가복음 11:20~21절입니다.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다음날 보니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배가 고팠다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니, 시장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를 만드신 분이신데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가셨을까요? 그것도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열매가 없다고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영원히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저주해 버립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한없는 긍휼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나무가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열매 없다고 저주 해 버리면 나무가 잘못입니까? 저주한 예수님이 잘못입니까?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없어서 수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이때라도 일찍이 나오는 열매가 있지만 그 열매가 작은 것들인데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죽게 하였다면 이런 예수님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이 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의 생각이 정상입니까? 타락 이후의 생각입니까? 타락 이후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도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나의 선악판단을 중심으로 해석하기에 예수님이 이상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시면 쓰시는 것입니다. 이 분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을 보면 토기장이가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마음대로 빚어내듯이 하나님은 긍휼과 진노를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1:15).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저주 받은 삶의 모습입니까? 축복받은 삶의 모습입니까? 나는 지금 당장 저주 받아도 마땅하지만 이 정도로 사는 것도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가느냐고 원망하십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갑자기 어려운 일들이 닥치니 이 문제들만 싹 해결된다면 우상에게 얼마든지 절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있어도 혹시 더 어려움이 닥칠까 해서 그런 말을 잘 못하는데 이분은 솔직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려움이 닥친 것입니다. 그러니 인과율적으로 생각하여 내가 목사에게 욕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마음도 들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무화과나무가 불평했습니까? 그냥 말라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쓰시듯이 이 무화과나무를 쓰신 것입니다. 여기에 불만이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피조물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 주에 볼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나서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또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선언과 말라죽은 것 사이에 성전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는 일은 성전의 기능이 돌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못하게 하심으로 열매 없는 성전을 완전히 파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당장 말라죽는 것처럼 이제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을 끝내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9:10~17절입니다. “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16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가 이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의 포도나무 같이 보았고 그들의 조상들을 처음 익은 무화과열매처럼 보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심어 놓았지만 맺힌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 결과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실 때에 어떤 열매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가 없습니다. 온갖 종교적인 탐심으로 인하여 우상숭배만 가득한 도적의 소굴을 파괴하여 버리는 것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른 잘못이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죽게 하신 주님께서 도적의 소굴인 성전을 심판하여 영원히 없애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미가서 7:1~4절입니다.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 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1)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1)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미가 선지자는 남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나 미가선지가 책망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로 비유를 합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무화과를 심는 이유는 사람이 그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약속의 땅에 심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긍휼로 심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맺힌 것이 긍휼이 아니라 애굽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맺은 온갖 탐심과 시기와 경쟁의 열매만 맺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심판하셔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여전히 도적의 소굴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 안에서 정말로 원수를 사랑하십니까? 무기를 없애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무기를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이 죄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당장 온갖 세상의 저주란 저주를 다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저주를 없애보려고 합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세상의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는다는 말에 속아서 헌신 충성 봉사를 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저주 받지 않고 복 받기 위한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저주란 저주를 다 받아도 마땅하다고 여기며 교회 다니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저주 받지 않으려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아무른 잘못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세상의 온갖 저주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 사람은 무슨 잘못을 많이 해서 저런 저주를 받느냐는 식으로 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저주를 다 받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짜로 영원한 저주는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늙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저주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영원한 저주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한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것은 그 인생의 마지막이 저주가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음에도 부자였던 사람이 자기의 부를 포기하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떠나간 그 사람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도 영생을 얻지 못한 저주의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4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나의 행위로 저주를 받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저주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생명에는 관심 없이 생존의 싸움만 하니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런 세상에 속하여 죄가 무언지도 모르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저주를 받지 말아야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그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 받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끌어안으시고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5:21). 예수님이 우리의 의와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십니다(고전1:30).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저주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저주로 보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복과 저주를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의 신에 속은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구원받는 길은 세상에서 환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지금 환난으로 보이지만 그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십자가의 사랑이 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지금의 환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저주와 같은 것들에 주눅 들지 마시고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