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6~5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019. 8. 18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지난주에 학생회 수련회를 했습니다. 중학생들에게 사는 게 행복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행복하지 않고 힘 든다고 하였습니다. 초등학생도 사는 게 힘 든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사는 게 힘 든다고 합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세상이 왜 이리 힘들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2:13).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니 도저히 만족이 안 되며 경쟁만 심화되니 힘이 듭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넘겨져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따라갑니까?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갑니다. 이러한 시기와 경쟁이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오늘날 교회도 시기와 경쟁을 한다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같은 품삯을 주시는 은혜로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나라를 만드시기 위하여 섬김을 받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 섬기심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의 뜻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자부심 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누구와 경쟁하여도 높은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높은 자리를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대비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바디메오가 등장합니다. 바디메오는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사람이 맹인일 뿐만 아니라 거지입니다. 제자들은 다 버리고 주를 따랐기에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경쟁하면서 따라가지만 이 사람은 거지이며 맹인입니다. 아예 경쟁의 대상에 들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왜 등장하는지 오늘 본문을 봅니다.

 

본문 46절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가는 길의 마지막 도시입니다. 물론 중간에 작은 마을들은 있지만 여리고라는 성읍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만 아니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십니다. 여리고에 머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지나가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여리고의 갈 가에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앉아있습니다. 그 아버지 이름도 나옵니다. 디메오입니다.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는 맹인이며 거지인데 왜 길가에 앉아있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자들이 구제를 하는 것이 의무이기에 그들에게서 적선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47절입니다. 많은 무리가 맹인 바디메오 앞을 지나가는데 그 무리 가운데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서는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사람은 마가복음에서 이 맹인 바디메오 뿐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지만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들로 오시는 분이 해야 할 일들 중에 치유하신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메오도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지도 못하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 질러서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디메오를 향하여 잠잠하라고 꾸짖습니다. 이 중에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 바디메오를 꾸짖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을 가라고 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실 덴데 어린 아이나 이런 맹인 거지는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하는데 그는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런 부르짖음이 한두 번 부르짖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보고서 우리고 크게 부르짖어 간청하면 우리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그것이 다시 나의 조건을 제시하여 나의 뜻을 이루려는 종교심에 불과한 해석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고 부자이기도 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돌아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예수님이 이루실 그 나라에서 누가 높은지 경쟁하면서 따라갑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데 맹인이며 거지인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부자 관원이나 제자들은 하나도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섬기심이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 관원이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고, 무엇을 해서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맹인 거지 바디메오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 자시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심을 맹인 거지가 안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눈뜬 사람도 모르는 것을 안 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하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 내가 여기 있노라고 여기 있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65:1). 바울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증언합니다(4:17). 이런 믿음이 선물로 받은 믿음입니다.

 

여기서 바디메오가 있는 여리고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여리고 성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약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 처음 마주치는 곳이 여리고 성입니다. 난공불락의 이중성벽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흙벽을 쌓거나 땅굴을 뚫는 것이 아닙니다. 6일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제사장이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침묵하면서 언약궤를 따라 성을 한 바퀴 돕니다. 마지막 7일 째에 일곱 바퀴를 돈 후에 여호수아가 고함을 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성읍이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이 겹쳐지는 것처럼 여리고에서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고함을 지르는 사람은 맹인 바디매오 뿐입니다. 무엇이라고 부르짖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9~5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으니 제자들이 간 것이겠지요!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맹인을 부르면서 부르는 사람들이 안심하라고 합니다. 방금까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부르시니 그에게 안심하라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겉옷은 이불도 되는 것입니다. 거지 맹인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것도 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5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 거지 바디메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합니다. 당연히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무엇을 하여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목요일은 지웅형제 모친 문상을 갔고, 금요일은 노회 안에 목사님 문상을 갔습니다. 이 목사님은 제가 늘푸른교회 오기 전에 교회가 어려울 때에 그 목사님께서 도움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몇 달 전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어떤 치료나 연명장치를 거부하시고 조용히 소천 하셨습니다. 마산에서 문상 마치고 창원병원 앞으로 오는데 로또 판매점은 여전히 줄을 많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거지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가라고 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눈을 뜨고 가라고 하셨으면 눈을 뜨고 집으로 가서 자기의 눈뜸을 보여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눈을 뜨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기는 그 길로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셔도 믿음이 은혜의 선물이기에(2:8) 주님께로부터 나온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부자 관원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면 그 사람은 율법을 지킨 것도 자랑이 될 것이며, 모든 것을 버린 것도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영생 앞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갔기에 서로 경쟁하면서 높아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조건으로 영생을 얻을 자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맹인 거지의 사건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부르짖음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까? 사람들에게서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교회까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에게 정성을 바쳐서 세상에서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을 뿐 아니라 신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저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만 어른들의 기도는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런 모습은 내가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한 맹인 거지 바디메오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는지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짖으니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이라도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면 구걸하면서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도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공익광고를 들어보면 장애인에 대하여 배려하라는 광고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유대 사회 속에서 장애인이면서 거지이기에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믿고 불러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보여줍니다.

 

로마서 11:29~31절입니다.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32절의 표현으로 하면 모든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 곳에 가두어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긍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에서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미들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 긍휼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오늘도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주님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