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11 예루살렘 입성 2019. 8. 25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1)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의 큰 흐름은 갈릴리 지역의 사역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역과 마지막 예루살렘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면 무슨 일을 당하실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오시기 전에 하신 말씀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첫날입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맞이합니다. 그러나 조용히 성안의 성전을 둘러보시고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아 버림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맞은 편 마을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는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데 풀어서 끌어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나귀를 풀어올 때에 왜 나귀를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보내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맞은 편 마을에 가니 나귀새끼가 있어서 풀어오려고 하니 나귀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니 나귀를 풀어가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서 나귀를 풀어오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그 사람에게 말해 두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각주 1)을 보면 주께서 쓰시고 곧 돌려보낼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각주가 있는 것은 이렇게 기록한 사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미리 말해두었기에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을 하면 나귀를 풀어가게 할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예수님의 주 되심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자기의 주인 됨을 더욱 공고히 하고 확장하려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는 피조물이며 예수님이 나의 주인임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5~36절을 봅니다.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누가 감히 주님께 무엇을 먼저 드림으로 갚으심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골로새서 1:16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만물의 다 주님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왕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서 주님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요란하여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보이지만 이미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런 사실을 세상은 몰라도 예수님을 주로 믿는 교회는 알기에 세상의 요란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미리 예언한 스가랴 9:9~11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11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쓰시려고 끌어오라고 하신 이유는 스가랴서의 이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의 선지자입니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옛날 성전과 비교하면 초라한 모습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도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하고 있기에 미약한 성읍이 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성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왕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공의로운 왕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데 온순하여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는 왕들과 고관이 병거와 말을 타고 성으로 온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7:25절입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남 유다의 멸망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키면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나귀는 한때 왕자들이나 높은 자들이 탔지만(5:10, 10:4, 삼하19:26) 이때는 왕과 고관들이 말과 병거를 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창조와 구원의 선물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안식일을 지키면 강한 나라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기와 병거로 강한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어떤 왕을 좋아하겠습니까?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말과 병거를 타고 오시는 왕을 원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에 만왕의 왕이신 분이 말과 병거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나 짐을 싣고 다니는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백성들의 환호는 지금 당장 다윗의 나라를 세워달라는 요청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요청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성전만 둘러보시고 조용히 나가십니다. 무리도 조용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는지를 봅니다.

 

스가랴서를 보았습니다.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고 오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으로 적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무기들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자기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 나라까지 평화를 전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시는 것은 언약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7~11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십니다.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얹을 뿐 아니라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펴고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폅니다. 이 나뭇가지를 종려나무라고 해서(12:13) 이 날을 교회에서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겉옷을 나귀위에나 길에 펴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는 모습입니다. 엘리사가 사환을 보내어 예후를 아합 집안을 치는 왕으로 세울 때에 주변 사람들이 옷을 예후 밑에 깔고 왕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도 겉옷을 깔고 찬송을 합니다.

 

그 찬송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뜻입니다. 시편 118:25~26절입니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스가랴 선지자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분을 향하여 호산나 찬송을 합니다. 여호와여 구합니다. 지금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다윗 왕처럼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합니다.

 

시편 148:1절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찬송을 합니다. 지금 미약한 이 나라를 다윗 시대처럼 세워줄 그런 강한 왕을 바라면서 성경의 이곳저곳의 내용을 그들의 메시아 관에 맞추어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스가랴서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셨지만 첫날에 아무른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성안의 성전을 둘러보고 저물게 되자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던 그 환호소리도 조용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한 수많은 메시아사상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든 기대를 실망시키는 일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에 의하여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넘겨지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며칠 만에 호산나 찬송을 한 무리들보다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지릅니다. 오늘 우리는 약함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원하십니까?

 

스가랴 9:10~11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무력으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고관들은 그런 로마와 손을 잡고 팍스 로마나를 함께 꿈꾸며 평화를 누리려고 합니다. ‘팍스 로마나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제정(帝政)을 수립한 때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런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 평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오시는데 호산나 찬송을 하고 있으니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메시아를 기다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서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에게 약속된 그 나라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가랴서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말과 병거를 모아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에브라임이 의지하고 유다가 의지하는 무기들을 없애버리신다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입니다. 그런 에브라임이 믿는 것이 병거이기에 그런 병거를 없애버리는 왕입니다. 예루살렘은 남 유다에 속한 곳으로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이 믿는 것도 군마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전쟁무기들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전하시는데 이방 나라에도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팍스 로마나를 만든 로마제국의 평화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9:37~44절입니다.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2)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하는 그들을 보시고 우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와 예수님이 전하는 평화와 너무 다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평화를 원합니까? 세상은 힘을 가져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있지만 세상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평화를 추구하여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신을 내어주신 그 평화 외에는 다른 평화가 없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참된 화평을 이루신 그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예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게 됩니다. 힘으로 군림하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