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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7~28 인자가 온 것은 2016. 11. 27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지난주에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품삯을 똑같이 주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간에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놀고 있는 이들을 주인이 포도원에 불러 일을 시킨 것은 품삯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는 주인의 선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동일하게 줌으로 오랫동안 일한 자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주인의 선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이 세상의 원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런 기업이나 나라가 있다면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나 가치관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이 임한 바울사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호와 전쟁의 충성된 용사인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이러한 자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림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을 바울사도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시는지를 봅니다.

 

오늘 본문 17~20절을 봅니다. “봉독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후의 말씀입니다. 주인의 선하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그 나라를 누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는지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이미 두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혀 이해를 못하였기에 말리고 나서며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21~24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고 나선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의 평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루어내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그 십자기의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22~23절입니다.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예수님께서 처음에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 말리고 나선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같은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이 매우 근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일임을 아시기에 이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이 살아나는 일이 인자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세 번째 하십니다.

 

본문 20~23절입니다. “봉독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한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배하십니까? 예배라는 것은 영과 진리가 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드린다고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종교의식일 뿐이지 예배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하다고 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바치게 만드는 것이 이 땅의 교회 현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세베대의 아내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구한 것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세배대의 아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길로 알았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길로 가시는데 이들이 구하는 바는 세상의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하시자 그들이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답변은 고진감래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이란 고난이며 십자가의 죽음의 길입니다.

 

그들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고 한다면 마시겠지만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하였을까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해하였다면 누가 서로 크고 높으냐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와 경쟁이 나오는 것은 그들이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심을 냄으로 인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면 경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포도원의 품꾼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말씀하신 내용과 이 말씀이 다 같은 맥락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열심을 내는 정도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아직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사랑을 제대로 알고 믿게 되었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본문 24~27절입니다. “봉독 세배대의 아내가 예수님께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는 청탁을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깁니다. 주말마다 서울에 대형 집회가 열립니다. 지난 주말에는 창원에서도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거리 행진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것은 분노로 인한 것입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등에 없고 불법을 통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예언이나 하듯이 이미 2년 전에 밀회라는 드라마에서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밀회에서 주인공이 최후진술 하는 대사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우아한 노비였지만 자신을 노비로 부린 그 여자의 꼭대기는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라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드라마 작가들도 돈의 꼭대기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서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더 크냐는 생각을 가지고 따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청탁을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마음 상태가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방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권력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누가 서로 높으냐며 시기와 경쟁을 하고 청탁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삼년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다닌 이유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측근에서 권세를 부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정 반대의 개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큰 자가 섬기는 자이며 으뜸인 자가 종이 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있습니까? 세상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의 나라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 세도를 부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할 이스라엘도 이방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누가 서로 크냐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을 갔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홀로 섬기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아무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다짐한 제자들이 결코 함께 할 수 없었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 내십니다.

 

오늘 본문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심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이미 사탄의 유혹으로 인하여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이러한 죄인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복음의 교제를 해 보았습니다. 강 집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제가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 집사님이 먼저 와서 복음의 교제를 한 후에 남편에게 이런 목사를 만났다고 문자를 보냈답니다. 그랬더니 그런 목사가 어디에 있느냐고 당신이 이상한 곳에 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함께 왔을 때에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는 말씀을 보고서 자신이 교회를 수십 년 다니며 성경도 보았는데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왜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섬김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천지에 다니는 어느 청년과 그 부모와 함께 상담을 위하여 왔을 때에도 이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하는 말이 그러면 신앙의 체제가 다 흔들린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왜 가족이 반대하는데도 그렇게 신천지에 가려고 하였겠습니까? 자신이 신천지에서 배운 그 내용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단체에 가서 배운 것입니다. 제가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면서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가 열심히 한 것은 자신의 그렇게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하여 대속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무엇인지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이라는 책에서 무려 90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90분 강의로 몇 달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그 중에 일부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단어와 오늘 본문의 대속물이라는 단어가 같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대속물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 전부를 찾아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연속적으로 약 20시간 정도 하면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대속물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해방이나 구원과 연관된 동사에서 온 명사형입니다. 그러므로 대속물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지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과 해방을 얻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형태들을 찾아보면 이스라엘을 구원한다(24:21), 예수께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한다(2:14), 은과 금처럼 없어질 것으로 구원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벧전1:18,19),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다(9:12), 종말론적인 구원(2:28), 그리스도 안의 구원(3:24), 몸의 구원(8:23),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이라는 총체적인 구원(고전1:30), 이러한 구원의 의미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 대속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다는 말씀은 대신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대신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다쳐서 운동장에서 나오면 다른 선수가 대신 뜁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대신이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시고 짊어지심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공간적인 이해로서는 이해불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속이나 대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으로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대신이 우리가 구경꾼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4~21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들을 강권하여 알게 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원수가 된 자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한 사람이 대신 하였다면 나머지는 죽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의 해석의 원칙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세속적 개념의 의미를 십자가를 해석하는데 덧 입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의 고유함에 세상을 끌어않고 변화시키고 마침내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기에 그 해석도 고유함을 깊이 고려한 해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에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2:2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대셨다는 것은 세상의 대신이라는 개념처럼 우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대속물로 자신을 주심이지만 그 안에 우리를 포함합니다.

 

떠난 이는 우리요, 함께 하신 이는 그리스도다. 버린 이는 우리요, 찾고 부르신 이는 그리스도다. 버림받은 이는 우리요, 버림받은 이와 함께하신 이는 그리스도다. 죄와 죽음과 사탄과 무지와 고난에 묶여서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요, 이들과 함께하시며 자신의 몸과 피로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시며 우리의 한계를 짊어지시고 죽음으로 우리를 그 속박에서 구원해 내시는 이는 그리스도다. 비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만이우리를 대신하는 분이요 우리는 철저히 대신당하는 이들이다. 예수 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한계를 짊어지셨을 때, 우리 옛 사람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자신을 우리와 나누시며 우리 모두를 십자가에 모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 주위를 서성이며 십자가를 의심하며 십자가로부터 도망갈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우리가 십자가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신성이나 자신에게 속한 그 무엇을 뚝 떼서 우리에게 선물을 건네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셨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조차 이루어내지 못하는 관계, 곧 가장 살아 있는 관계를 회복한다. 어떤 관계도 함께 죽는 것보다 더 살아 있는 관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죽음으로, 그 몸과 피로, 자신을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끌려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신다고 하신 그 내용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세상의 높은 자리를 얻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진 그 모습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이루신 결과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한 자들이 예수님께서 가신 그 섬김의 길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오늘도 그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인자가 오신 것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 분이 지금도 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 섬김을 받은 자들이 그와 함께 그 섬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