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3:20-28 앞서는 주의 사자(使者) 2010. 12. 5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22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27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올해의 마지막달 12월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습니까?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금까지 잘 지내 왔습니까? 차 집사님은 아직도 한숨이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항상 봅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어려운 일 본다는 복음성가 가사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친히 인도하신다고 하신다는데, 구름기둥 불기둥은 어디에 있습니까?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과연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는 하십니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20절과 23절에서는 내 사자를 네 앞서 보낸다고 합니다. 27절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을 네 앞서 보내신다고 합니다. 28절에서는 왕벌을 네 앞서 보낸다고 하십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하여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친히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늘 거역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를 말합니다. 흔히 모세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사자의 심부름꾼입니다.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출애굽기 3:1-5절을 봅니다. “봉독” 떨기나무는 가시덤불 같은 나무입니다. 불이 붙으면 훅하고 살라지는 나무인데 그 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불이 붙어 있어서 이상하여 가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불꽃 안에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로 하나님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그러니 그냥 수많은 천사중의 한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사자입니다.

 

21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 사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사자이기에 여호와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는 사자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이 여호와의 사자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래서 구약신학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이 사자를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자가 인도를 하시는데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구름기둥 불기둥으로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하는 것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하시는 길이 얼마나 싫었는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430년을 종살이 하던 곳입니다. 요셉이 살아있었던 때를 뺀다고 하여도 약 400년을 종살이 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종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 출세하여도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우두머리정도밖에 될 수가 없는 참으로 답답한 신세입니다. 탄식과 고난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여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하시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길입니다. 가도 가도 광야만 있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고 있지만 그것만 바라보며 가기에 지쳤습니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종으로 살던 애굽이 더 좋다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수시로 데모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싫어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2-3절입니다. “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시는 것 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길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길들이 멸망의 길인데도 자기들이 고집하는 것입니다. 잠언 14:12절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인데 그 마지막이 사망의 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하는 길, 즉 말씀으로 인도하는 길은 마치 죽는 길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주의 인도를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양식과 물이 있어야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하늘로서 오는 양식인 만나만 먹고서는 질려서 싫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말합니다. 그러니 매일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만이냐고 아우성입니다. 부활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삶도 있고 사명도 있는데 그런 재미난 요소들을 다 빼버리고 무슨 재미로 교회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해야 바치는 재미도 있을 텐데 바친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내개 행할 일들을 다 빼버리니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늘과 파와 부추를 달라고 합니다. 고기도 달라고 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내 존재 가치가 높아질 만한 것들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주의 사자가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다녀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애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래서 날마다 인도를 받아야 하는 그런 신세는 싫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달려가도 부족할 판에 어린애가 되라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다시 20-21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서 예비한곳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그의 사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싫은 것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듣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두 번 만 같은 소리하면 인상이 달라집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은 어른들의 잔소리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상관의 잔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사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장이 되어도 종업원들이 데모하면 그것도 싫습니다. 그래서 회사 회장이 야구 방망이로 때리면서 한 대에 백만 원씩 10대를 때리고 살려달라고 하니 한 대에 삼백만원이라고 하면서 세대를 더 때렸습니다. 잔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모든 행사를 악하다고 바른 소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잔소리로 들려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의 일들이 악한 일도 있지만 그래도 선한일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구제도 하고 선행도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에 돈을 보냈더니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카드로 엉뚱한 짓들을 하였습니다. 적십자도 마찬가지이고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이 다 악합니다. 설교를 해도 선교를 해도 무엇을 해도 다 자기의 이름과 연관이 되어 있기에 악하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부인하여야 하는데 우리의 행위, 그것도 선하다고 하는 행위가 나왔을 때에 과연 부인이 되어 집니까? 이것은 내가 아니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런 고백이 나옵니까? 그런 고백이 혹 나오면 그것조차 얼마나 대단하게 여겨집니까? 세상의 행사가 이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의 사자, 그것도 잘 보이지도 않는 주의 사자의 인도를 받아서 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들이 주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이들의 주의 사자의 말씀에 순종을 잘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시겠다는 주의 언약의 말씀을 주께서 신실하게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2절부터 봅시다. 주의 사자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그 사자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내 말대로 하면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 것이며 가나안의 사람들의 땅에 인도하여 그곳의 사람들을 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적들을 물리치고 왕벌을 보내어 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양식과 물에 복을 주는 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을 제거하고 낙태하지 않게 하고 임신을 하게 하는 것이 우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서 가시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신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누가 순종하였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여호와께서 이루어내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늘나라는 사람들이 순종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분 때문에 들어갑니다.

 

신명기 1:29-33절을 봅니다. “봉독” 가나안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처럼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광야를 하나님이 안고 이곳까지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32절을 보시면 이 일에 너희가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지 않아도 이곳 까지 안아가지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믿음조차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먼저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구름으로 낮에는 구름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셨기에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십자가로 완성하셨기에 자기 백성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언약의 완성을 선물로 들고 오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 자신이 행한 것이 다 죄뿐임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4:1-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 떠나시면 어떻게 되느냐는 두려움과 근심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 시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거처가 예비 되면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합니다. 이 거처가 완성이 되었기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습니다. 그 분이 앞서 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