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1:18-27 눈에는 눈으로   2010. 10. 10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 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27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오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에 대하여는 지식을 좀 가지려고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나, 소설가나, 만화가나, 법에 대하여 연구한 사람들도 이런 구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끼라는 만화와 그 만화가 영화로도 나왔는데 이 성경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우선 다른 법들을 간단히 보고 동태복수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8-19절은 자유인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서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쳤는데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면 그를 친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 기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의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사람이 싸우는 중에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가 일어났다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벌금을 내게 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자기 남편이 싸우는데 도우려고 하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요! 이런 법은 태아에 대하여서도 보호하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임신중절을 아무렇게나 하는 이 시대에 다시 보아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20-21절은 남종과 여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당시에 노예는 주인의 재산입니다. 임의로 처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도 별 제제가 없이 진행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종에게조차 주인이 합부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이 종을 때리다가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게 합니다. 주인이 종을 교화하기 위하여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일 의도를 가지고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6-27절을 보시면 주인이 종을 때리다가 신체상의 상해가 나면 그 대가로 종에게 자유를 주게 합니다. 아주 파격적인 종에 대한 예우입니다. 이런 법을 주신 것도 그들이 종이었다가 긍휼로 나온 것임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제 23-25절입니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 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과도한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으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한화그룹 아들이 고급 바에서 폭력을 행사하였는데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고 합니다. 이 아들은 20살인가 그런데 승마 국가대표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이 아들의 형이 맞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보복을 한 것이 한참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재벌 아들이 맞았다면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들이 한 대만 맞았다고 때린 자를 한 대만 때리겠습니까? 거의 죽도록 보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법대로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대를 맞았다면 재판관에게 고소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정당하게 한 대만 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인 과도한 복수를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주어진 법입니다. 마치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도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주어졌듯이 인간의 복수심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 아시기에 이런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이 없다면 이스라엘 사회라고 하여도 힘 있는 자는 과도한 복수를 할 것입니다.

 

처음에 만화와 영화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끼’입니다. 한 남자가 월남전에서 참혹한 현실을 목격합니다. 숨어서 총을 쏘는 베트콩을 사살하였는데 만삭의 임산부입니다. 죽으면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를 안고 나온 이 사람이 자해를 하고서 전역을 합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생식을 하고 기도하고 발가벗고 다니고 한두 달 동안 성경을 50독을 합니다. 얼굴에서 독기가 빠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말 몇 마디로 사로잡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원 원장이 이 사람 때문에 헌금이 나오지 않으니 형사에게 부탁하여 사기죄로 교도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사람이 형사에게 부탁을 하는데 기도원에 있는 한 처녀의 성경에서 출애굽기 21:23-25절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찾아서 읽는데 그 성경 위 여백에 몇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처녀를 강간하고 임신하자 강제로 낙태를 시키고 때리고 마을에서 쫓아내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복하는데 목숨만 붙여두라고 합니다. 형사가 얼마나 때리는지 아마 생식기도 다 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기도원의 신도와 기도원의 원장을 형사와 더불어 심판을 집행합니다. 동태복수법을 인용하였다면 자신도 당한만큼만 복수를 해야 하는데 감옥에서 나오는 날 형사와 더불어 기도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서를 쓰게 하고서 다 죽여 버립니다. 그건 만화이지 정말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가 할 것입니다.

 

창세기 4:23-24절입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상처를 입었는데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호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나 더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인인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일 자격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하나님의 법도 아닌데 스스로 법을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처를 입었다고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가해를 하는 자는 벌을 칠십칠 배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쫓겨난 인생의 자기 보호 본능이며 다른 사람은 다 죽이더라도 자기는 홀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인간의 죄악 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을 율법으로 주신 것은 인간의 악함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복수를 하려는 그 복수심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태복수법이 시행되지 아니하면 힘 있는 사람과 약자 간에 분쟁이 일어날 때에 언제나 당하는 사람은 약자일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으로 해결함으로 자신의 신체는 보호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잘못하여 태형을 선고받으면 그를 대신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는다는 것이 흥부전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동태복수법이 있다는 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에 남북이 다 돈으로 다른 사람을 사서 징병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전쟁터에 돈 많은 집안의 아이들은 보내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돈 주고 사서 전쟁터에 보낸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징병제를 하였지만 부자들은 용병들을 사서 전쟁터에 보냄으로 나중에는 오히려 그것이 로마의 위협이 되고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동태복수법이 지켜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율법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38-39절을 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가 들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모세보다 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 말씀은 듣는 유대인들의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유대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율법에 명시된 동태복수법조차 무력화 시켜버리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라고 합니다. 사람이 오른 뺨을 맞는다면 치는 자가 왼손잡이 일 경우입니다. 그런데 오른손잡이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잡이가 때리는데 오른 뺨을 맞았다면 손등으로 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모독입니다. 그런 모독을 받고서도 대항하지 말고 왼뺨조차 돌려대라고 합니다. 동태복수법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또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 까지 주라고 합니다. 겉옷이 훨씬 비싸고 중요합니다. 잘 때는 이불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도대체 살라는 말입니까? 죽으라는 말입니까?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임의로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서 부역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절 말고 배나 더 하라고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약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와서 동태복수정도가 아니라 적들을 완전히 진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크고 강한 나라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그런 메시아야 여야 하는데 누가 이런 자를 메시아라고 따라나서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억울함을 해소하여 주는 그런 메시아, 자기의 가려움을 긁어주는 그런 메시아야 여야 한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따라가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여깁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명시적인 율법의 조항도 너희가 그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해석하시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전부다 걸림돌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집에 가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러기는커녕 사소한 손해와 억울함 때문에 동태복수가 아니라 77배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태복수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자들이기에 영원한 지옥형벌 외에는 달리 피할 길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내 나라를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다른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나라를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또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모든 복수를 끊어버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다 받아내시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인 고린도전서 7:29-31절을 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십자가로 다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세상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 종말의 영을 바울사도가 받은 것입니다. 두고 보자 내가 잘되어 복수 하고 말겠다고 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때가 단축하여 졌습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갑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