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2:1-15 배상하라 2010. 10. 24

 

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 14 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15 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있었으면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만일 세 낸 것이면 세로 족하니라

 

배상(賠償)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11번이 나옵니다. 배상의 기준은 사안마다 다릅니다. 1절을 보시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았다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배상하라고 합니다. 소 한 마리 훔쳐 팔다가 잡히면 집안 망칠 정도로 과중한 배상을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동일하게 도둑질을 하여도 그 훔친 소나 나귀나 양이 훔친 사람의 집에 있으면 배만 배상하면 된다고 합니다. 출애굽 주석을 보니 1절은 전문가 수준이라 도둑질 한 것을 재빨리 처리 한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은 초범이라 어떻게 할 줄 모른다고 봅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을 훔친 도둑이라도 사안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을 보고 쳐 죽였을 때에 밥에 쳐 죽이면 정당방위가 되어 피 흘린 죄가 없지만 해 돋은 후에 도둑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도둑질 하다가 잡히면 반드시 배상해야 하며 배상할 것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배상하게 합니다. 그 다음의 내용들은 물건이나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다가 도둑을 맞거나 죽거나 하는 경우에 어떻게 배상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법을 주신 것은 도둑질 하지 말 것이며 또 잡히면 반드시 배상을 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았을 때에도 책임을 다하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이 정도는 성경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법에서도 이 정도는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배상의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도둑이 잡히면 배상해야 하고 배상할 것이 없으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법과 성경의 율법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대한민국의 법은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만들었고 성경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법들을 주셨습니까? 단지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과 손해 배상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야 할 법들이 수여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차지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통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나의 소유를 더 늘이기 위하여 도둑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 방식은 애굽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입니다.

 

애굽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 지금 국회의 국정감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비리들이 다 밝혀집니다. 물론 더 큰 비리들이 밝혀지지 않고 묻히지만 온갖 특혜와 부정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는데 권련이라는 곳에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얼마 전에 청문회를 통하여서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비리와 특혜와 도둑질이 팽배한 것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소유의 넉넉함에서 오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 양의 피로서 구원받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소유의 넉넉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이 율법을 잘 알아야 하고 이 율법의 수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사사며 선지자며 제사장이며 왕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모독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레미야 5:30-31절을 봅니다.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런 모습이 대한민국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가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두 왕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2:1-15절을 봅니다. “봉독”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는 이런 일을 엄두에 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전쟁도 거의 마무리단계에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밧세바를 보고 간음하고 나서 임신하였다고 하니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충직한 우리아를 불러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군사밀령을 손에 들려줍니다. 그 편지는 자기를 죽게 만드는 내용인데 충성스럽게 전달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애곡기간이 끝나고 밧세바를 아내로 데려옵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입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하는 것이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선지자가 비유로 말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데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먹고 함께 자는 딸과 같은 양입니다. 그런데 행인이 부자 집에 오니 자기 집의 양과 소를 아껴서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들 위하여 잡았다고 합니다.

 

5절을 봅시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이 노하여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죽이지는 않습니다. 몇 배로 갚아야 합니까? 양이기에 네 배로 갚게 합니다. 다윗 왕이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네 배로 갚아야 하는가 하면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도둑질을 금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을 훔친 정도가 아니라 남의 아내를 간음하고 임신하자 그의 남편을 죽인 다윗인데 자기의 잘못을 모릅니다. 이것인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이방의 왕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책망을 합니다. 다윗이 회개합니다. 여호와께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단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네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칼이 그 집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이웃 그것도 아들에게 욕을 보며 아들들 사이게 칼부림이 일어나고 강간이 일어나고 아들의 왕을 죽이려고 반역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말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가족과 같은 양을 빼앗아 왔으니 그런 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죽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기준은 양 한 마리 훔치면 네 배만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그런 자는 죽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까?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이 맹세에 다윗 자신이 걸린 것입니다. 양 한 마리 훔친 것이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네 배로 물어주고 끝날 일이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영원한 멸망을 받아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죄인임을 자기 자식들의 암투와 반역을 통하여 더욱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여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니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아들이 반역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아들을 공격하는 장군들에게 아들을 잘 봐달라고 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다윗은 왜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지 처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고백이 시편 51편입니다. 자신이 여호와께만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범죄란 다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죄인이라고 합니다.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모태 죄인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죄 뿐이기에 주의 긍휼과 자비로 용서 받아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대신 죽은 충성된 여호와 전쟁의 군인 우리아가 대신 죽고 그의 아들이 대신 죽는 것처럼 누가 대신 죽어야 자신이 사는 것임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는 양을 네 배로 물어주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갚을 수가 없는 배상은 누가 대신 배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원 뜻입니다.

 

두 번째는 아합 입니다. 열왕기 상19:38-43절입니다. “봉독” 오늘 본문에 물건을 맡겼는데 도둑을 맡거나 잃어버린 경우에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를 아합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아합 왕 때에 아람왕 벤하닷이 쳐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아합 왕이지만 아합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적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적장 벤하닷을 살려 보냅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가 변장을 하고 아합에게 와서 비유로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이 적을 포로로 잡았는데 나에게 지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잃어버리면 네 목숨을 대신하거나 은 일만 달란트를 내어야 한다고 하고 내가 맡았는데 볼일 보는 사이에 그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왕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왕이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때 선지자가 변장을 벗으니 왕이 알아봅니다. 이때 선지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벤하닷을 살려주었기에 당신의 목숨은 그를 대신하고 당신의 백성이 그의 백성을 대신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합이 분하여 갔습니다.

 

이런 경고를 아합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바로 다음 장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나봇을 죽입니다. 왕이라면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맡기셨기에 잘 관리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백성의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는 나봇을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아합과 이세벨이 비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고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뜯어먹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지 아닌지는 무엇을 보면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친척이 구원파에 다닌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고 합니다. 그냥 교회 가는 줄 알았는데 그 딸이 자기 어머니를 보고서는 절대 그런 교회는 안 나간다고 하였답니다. 구원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철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가 용서 되었기에 아직도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구원의 욕망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번 이용하고 폐기처분한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구원의 확신을 장로교 교인들이 오히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었으니 구원은 따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예를 보시기 바랍니다. 평생 자기의 죄를 더욱 깊이 알아갑니다. 자식들의 반역에도 울고, 노년에 인구조사를 하고서도 재앙이 임하자 자기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죽게 되었다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서 돌아서서 나봇을 포도원을 빼앗고 죽입니다. 다윗과 같이 빼앗고 죽이는 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용서를 받았고 아합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고 아합은 버리십니다.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는 사람이며 버림 받는 자는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재앙이 쏟아져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은혜로 임한 사람은 주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에 모든 것이 다 주님께로부터 와서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감을 압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평소에 자기의 것이라고 고집하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면 그때 회개하는지 원망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주님 내 것이라고 평소에 주장하며 고집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이럴 때 회개가 나오는지 원망이 나오는지 주님과 본인이 알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다윗이나 아합처럼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내 몸, 시간, 물질, 자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것 인양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주인의 아들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 아들이 상속자니 저 아들을 죽이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면서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 범죄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 아들의 피를 배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의인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입니다. 온 인류의 의를 몽땅 다 합하고 인간의 가치인 진선미를 다 합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더러운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갚을 수가 있습니까? 거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지 다음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1-10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지나가십니다. 이곳에 삭개오가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입니다. 키는 작습니다. 로마시대에 세리 장은 조국의 반역자 취급을 받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이 삭개오가 부자가 된 것은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것은 돈 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함을 본인은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러 갔다가 키가 작으니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세리장이가 체면도 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 앞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의 열심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신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피하여 가시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부러 삭개오를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쳐다보시며 속히 내려오너라고 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적이며 은혜이며 구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집에 거하시면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아마 삭개오의 배에 많은 상처가 났을 것입니다. 급하게 나무를 안고 주르르 내려오면 그렇게 되었겠지요! 얼마나 기뻤으면 그랬을까요? 그러자 뭇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수군거린 자들이 누구입니까? 평소에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입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이것이 수군거림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이 이미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된 세인과 죄인들과 창기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된 것입니다.

 

이때 삭개오가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만인 누구에게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도둑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이런 일을 하였기에 구원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기에 그 집에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살리는 것이 자기의 소유물인줄 알았는데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에 속인 것이 있다면 네 배만 갚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 받은 자의 모습이지 이런 행위로 구원을 얻어 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잃어버린 자를 주님께서 찾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인의 것을 다 배상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인이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자신이 다 담당하셔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고 살려내시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런 자들은 삭개오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